•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2장 시간의 측정과 보시
  • 5.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
  • 옥루, 성군이 이룩한 유교적 이상 사회를 구현하는 물시계
문중양

한편, 자격루를 성공적으로 제작해서 세종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고 2계급 특진의 은혜를 입은 장영실은 또 하나의 물시계를 더 제작하였다. 그것이 옥루였다. 자격루가 복잡한 기계 장치를 이용해 정확한 시간을 자동으로 소리와 시패(時牌)로 알려 주는 기능만을 지녔음에 비해, 옥루는 시보 장치에 자연의 형상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하는 장치를 덧붙인 일종의 천문 시계였다. 세종대에 만든 혼의가 복잡한 기계 장치를 통해 시간을 알려 주면서 동시에 천체의 운행을 시뮬레이션하는 전형적인 천문 시계였다면, 옥루는 그러한 구조와 원리를 그대로 활용해서 천체의 운행뿐 아니라 성군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지상 낙원을 재현하는 시계였다.

옥루의 형상을 살펴보자. 옥루는 정교한 기계 장치로 작동되는 자동 물시계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기계 장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옥루의 가운데에는 풀 먹인 종이로 산의 형상을 7척 높이로 만들었고, 그 둘레 사방에는 매 시각마다 목탁과 종, 그리고 북을 쳐서 시각을 알려 주는 인형들을 세워 놓았다. 산의 허리에는 금으로 탄환(彈丸) 크기만한 해(日)를 만들어 구름과 함께 하루에 한 번씩 돌게 하였다. 또한, 산의 동서남북에는 『시경(詩經)』 빈풍도(豳風圖)에 묘사되어 있는 사계절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즉 유교적 지상 낙원의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84)이러한 옥루의 형상에 대해서는 앞의 『세종실록』에 수록된 김돈의 「흠경각기」를 참고할 것. 그야말로 성군(聖君, 세종)이 다스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회, 그리고 자연의 이치가 순리대로 구현되는 자연의 세계를 재현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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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 상상도
옥루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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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가 재현한 형상을 통해 세종대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가 지닌 성격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옥루가 제작된 시기는 천문 역산의 프로젝트가 끝나는 1438년(세종 20)이었다. 자격루·간의·일성정시의 등의 과학 기구들을 모두 창제한 후 마지막으로 옥루를 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성공리에 진행하여 온 프로젝트를 옥루로 마무리하려 했음을 말해 준다. 옥루가 제작되자 세종은 다시 매우 기뻐하면서 왕의 처 소인 천추전(千秋殿) 바로 옆에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옥루를 두도록 하였다. ‘흠경’은 『서경』 「요전」의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하여, 백성에게 때를 알려 준다(欽若昊天敬授人時).”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옥루 제작을 통해 과거 요임금·순임금·탕왕(湯王)·무왕(武王)에 버금가는 치세를 펴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근대 사회에서의 시계는 근대 사회에서의 시계와는 그 사회적 기능이 너무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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