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3장 역과 역서
  • 4. 전통시대 역법과 천문학 발전의 성격
전용훈

전통시대 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우리나라 전통 천문학의 황금기는 세종 때이고, 그 계기는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칠정산내외편』이 이미 알려져 있던 중국의 수시력이나 대통력의 장점을 취하여 계산과 예보의 정확성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통 천문학의 발전을 『칠정산내외편』 같은 역법 체계만을 중심으로 보면, 천문학의 실질적인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전통시대 우리나라에서 역법을 매개로 천문학 지식이 정비되는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100)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용훈, 앞의 글, 2005, 131∼161쪽 참조. 먼저 역서를 만드는 방법, 즉 역법을 수입하여 이해하는 것은 한 시대의 천문학이 발전하는 시발점이 된다. 다음으로 역법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국왕이 위치하는 경위도에 맞추어 관측 기구를 제작하고 관측을 수행하는 일이 뒤따른다. 역법에 따른 계산 결과가 실제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실력이 쌓인 것이다. 역법을 매개로 한 특정 시기의 천문학 발달의 마지막 단계는 역법 지식과 관측 천문학적 지식을 기초로 하여 현지에 알맞은 시각법을 세우고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예외 없이 따라야 할 시간적 규범을 만드는 것이므로, 나라마다 국가적으로 천문학 지식을 정비하는 최종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대의 천문학 발전의 과정을 보면 이와 일치하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역시 첫 번째 단계가 역법 지식의 습득과 적용이었다. 1432년(세종 14)에 세종은 천문관들이 계산한 일식, 월식, 절기 등이 중국에서 계산한 것과 일치하자 이를 커다란 성공으로 여겼다. 다음 과정인 천문 기구의 제작과 이를 통한 관측은 대체로 1432년부터 1433년까지 진행되었다. 한양의 위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당시 가장 효율적인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를 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경회루(慶會樓)를 빙 둘러서 여러 천문 기구를 설치하였고, 40척이나 되는 해 그림자 측정용 동표(銅表)를 간의대(簡儀臺)의 서쪽에 설치하였다. 세종대 천문학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한양의 위도에 맞춘 시각법의 적용이었는데, 이는 1433년에 완료되었다. 이미 측정되고 확인된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장영실은 물시계, 즉 자격루를 1433년 9월에 제작하였고, 이것은 이듬해부터 정식으로 조선 시각의 표준으로 사용되었다.

전통시대에 한 국가에서 이룩한 천문학 지식 수준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려면 역법 지식을 적용해서 역서를 만들고,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며, 관측 기구를 제작하고 관측하며, 본국의 위도에 맞는 시각법을 적용하는 일련의 작업이 완성되는 것을 통틀어 논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천문학 지식의 수준을 역법 지식의 수용과 적용에만 중점을 두어 평가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국가가 천문학 지식을 정비하는 최종 목적이었던 통일된 시간적 규범의 설정이라는 근본을 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세종대의 천문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세종대에 천문학이 최고 수준으로 발달하였고, 그것이 이후 시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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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도(景福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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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천문학의 여러 요소 중 역법에 관련된 지적인 활동의 층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이론적(theoretical) 층위와 실행적(practical) 층위로 분리할 수 있다. 역법은 기본적으로 천체가 운행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기술하며, 이것을 역서라는 형식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서 천체 운행에 대한 원리적 이해와 기술은 이론적 층위에 해당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서를 작성하는 것은 실행적 층위에 해당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한 시대 천문학의 발전이나 쇠퇴를 판별할 때 주로 역법과 관련된 이론적 층위의 지적 활동만을 지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실행적 층위의 지적 활동은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 층위에서는 여전히 이전 시대의 지식이 계승되거나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천문학 지식의 쇠퇴로 평가한다.

전통시대 천문학의 역사에서 역법 지식과 관련된 이론적 층위에서의 지적 활동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만, 실행적 층위에서의 지적 활동은 지속적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세종대에는 수시력 체계를 중심으로 하여 달, 태양, 오성의 운행과 일식과 월식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수학적 계산법이 연구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이런 이론적 층위의 지식 활동은 일단 1432년에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제 수준에 오른 이론적 층위의 지식을 실행적 층위로 이전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역법 지식이 천문학자의 지적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역서의 반포와 교식의 예보(豫報)라는 실행을 목표로 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이론적 지식을 실행적 지식으로 전환해 내는 장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순지가 주도해서 편찬한 『칠정산내외편』을 비롯한 각종 『교식가령』, 그리고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같은 책이었다. 이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물론 이론적 지식이 기초가 되고 있지만, 편찬 목적은 처음부터 이론적 지식의 교육이 아니라 실행적 적용이었다.

달리 말하면 『칠정산내외편』 등의 책은 천문학 이론에 대한 교과서가 아니라, 역서를 만들거나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는 데 필요한 계산을 해내는 방법을 공식처럼 정리해 놓은 책이다. 이들 책에는 분명히 조선 전기에 도달하였던 가장 수준 높은 역법 지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이들 책이 의미 있는 것은 이론적 층위에서 도달한 지식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실행적 층위에서 실제 사용될 수 있는 실용성 때문이다. 『칠정산내외편』이나 각종의 『교식가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개 “A라는 값을 구하려면 B라는 수치와 C라는 수치를 곱하여 D로 나눈 다음 E를 더해 F값과 비교하여 서로의 차이를 따진다.”는 식의 서술이다. 바로 이들 책은 역서를 작성하고 교식을 예측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계산의 방법과 순서를 알려 주는 교본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이론적 층위의 지식을 실행적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규범화하고 정식화한 것이다.

이론적 층위의 역법 지식이 실행을 위해 규범화되고 정식화되어 하나의 교본이 된 가장 극명한 예는 이순지와 김석제(金石悌)가 1458년(세조 4)에 편찬한 『교식추보법(가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방법과 순서를 서술한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책의 서술이 노래와 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문관들이 계산의 방법과 순서를 노래로 부르고 시로 읊어 암기한 다음, 실제 계산에서는 수치만 적용하여 필요한 계산을 해낼 수 있게 하려고 만든 책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층위에서 연구하고 이해한 역법 지식을 규범화하고 정식화하여 실행적 층위로 진입시키는 독특하고도 효과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늘 최고의 찬사를 받는 세종 때 출간된 천문학 서적들은 이미 확립된 이론적 역법 지식을 실행적 층위로 이전하기 위한 정식화와 규범화를 위한 것일 뿐, 세종대에 도달한 천문학 수준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효과적인 교본들을 갖게 되자 세종대 이후의 천문학 활동은 거의 모두 실행적 층위에서만 벌어졌다. 이미 정밀한 수준의 역산 지식에 기 초하여 역서를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교본을 가졌고, 국가적으로 통일된 시간적 규범이 존재하는 마당에 천문관들의 활동은 확립된 교본을 통해 역서를 제작하고 교식을 예측하는 실용적 계산에만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 이후의 천문학은 자칫 쇠퇴와 퇴보로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결코 쇠퇴나 퇴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천문관들은 세종대에 달성한 이론적 층위의 역법 지식이 한계를 드러내는 17세기 초까지 계속해서 동일한 수준의 이론적 지식을 기초로 하여 실행적 층위의 지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천문관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천문 관측을 행하며, 또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역서를 만들어 백성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시간 규범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통시대의 한 왕조가 천문학 지식을 정비하려 할 때 지녔던 목표, 즉 모든 백성이 따라야 할 통일된 시간적 규범을 만들려는 목표가 세종대 이후에도 충분히 달성되고 유지되었던 것이다.

역법 지식에서 이론적 층위의 지식이 언제나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현대 과학적 관점을 역사적·문화적 맥락이 다른 전통시대에 투영하면서 생겨난 선입견이다. 역법 지식 전체를 놓고 볼 때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이론적 층위의 지식은 전반적으로 진보해 왔지만, 지속적으로 진보하는 경로를 밟은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바뀌면 제도도 바꾼다는 수명개제의 이념에 따라 역법의 개정이 요구되었던 시기에 이론적 층위의 지식은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일단 이론적 층위의 지식이 확립되고 이것이 실행적 층위로 진입하고 나면, 일반적으로 그 지식은 배경으로 숨고 표면에는 실행적 층위의 활동만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역법 지식의 발전도 마찬가지의 경로를 밟았다. 조선 왕조 초기에 천문학에서는 이론적 층위와 실행적 층위의 지적 활동이 동시에 필요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에 이루어진 천문학 방면의 연구는 그런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에 이 두 가지 층위의 지 식이 모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달성되고, 이론적 층위의 지식이 실행적 층위로 진입하게 되면서 이후의 시대에 천문 역산 활동은 실행적 층위에만 집중되었으며, 이것이 세종대 이후의 천문학을 퇴보나 쇠퇴로 보이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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