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3장 역과 역서
  • 5. 한 해의 길이 재기
전용훈

역서를 만드는 것은 자연의 시간을 반영하여 인간 생활의 시간적 규범을 만드는 것이므로, 역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연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해의 길이, 한 달의 길이, 하루의 길이 등이 역서의 제작에 가장 중요한 단위 시간들인데, 오랜 역사를 통해 전통시대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정확한 역서를 만들려면 이런 단위 시간를 정밀하게 측정해야 하므로, 천문관들은 여러 기계적 장치와 수학적 고안을 통해 최대한 자연의 시간 단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자 하였다. 천문관들이 썼던 복잡한 관측 기구와 수학적 계산법들을 동원하지 않고, 역서 제작에 기초가 되는 단위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창의적 착상과 과학적 원리를 일반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한 해의 길이를 재는 방법에서 볼 수 있다.

첨단 과학 기기를 쓰지 않고 고대의 상황에서 달력을 만들어 보기로 할 때,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띄는 자연적 시간의 변화는 낮과 밤의 변화일 것이다. 밤낮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측하며 시간이 지나가면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좀 더 장기적으로 관찰하고 그 변화의 패턴에 주의를 기울이면, 부정확하지만 대체적인 계절 변 화의 주기성을 알게 될 것이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연이 변화를 통해 드러내는 시간적 흐름을 파악하고, 그 흐름의 주기성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하루의 길이, 한 달의 길이, 한 해의 길이 등을 정확히 알아야 몇 백 년이 지나도 틀리지 않는 달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밀한 관측 기구와 수학적 계산법이 뒤따르지 않으면 정확한 주기를 알아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밤낮의 변화나 계절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기는 쉽지만, 그것의 주기를 정밀하게 측정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밤낮이나 계절의 변화가 주기를 확정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주기적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천체 현상은 매우 뚜렷한 규칙성이 있어 변화의 주기를 알아내는 데 아주 좋은 방편을 제공한다.

현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천체 현상의 규칙성을 가지고 한 해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하면, 얼른 고대 이집트 인들의 예화(例話)를 떠올리며 시리우스(Sirius, 늑대별)가 떠오르는 시간을 표시해 두었다가 다시 그 시간에 오는 때까지를 1년으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한 해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이미 그에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는 시계 장치가 있다고 가정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고대에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는 고작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등이 있을 뿐이었다. 해시계는 어차피 시리우스가 뜨는 밤에는 사용할 수 없고, 물시계나 모래시계는 대강의 시간을 잴 수 있지만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에는 턱없이 부정확하다.

시계 없이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 이것은 고대인들이 고안해 낸 창의적인 방법이었다. 고대인들은 해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짧은 막대기 하나로 하루의 길이, 한 해의 길이를 측정하고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었다. 전통시대에 이 해 그림자 측정용 막대기는 표(表)라고 하였는데, 서양 에서도 같은 방법이 알려져서 이것을 달리 노몬(gnomon)이라고도 부른다. 낮에 평평한 면 위에 노몬을 꽂으면 평면 위에 드리워지는 해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적당한 시간 간격으로 그림자가 떨어지는 지점을 표시해 가면 낮 동안 그림자가 떨어지는 위치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이제 노몬을 세운 지점을 중심으로 컴퍼스를 사용하여 적당한 원을 그리면 원주 상에는 오전과 오후에 떨어진, 두 개의 길이가 같은 그림자가 위치하게 할 수 있다. 이때 이 두 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이 선이 정확히 동서를 잇는 선이 된다. 이 선에 수직선을 그으면 남북 축을 얻을 수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네 모서리가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에 일치한다고 하는데, 고대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정확한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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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의 방향이 정해지면 다음 날부터 계속 그림자를 관측해서 하루 중 정북을 가리키는 선분에 그림자가 떨어지는 때에 그 그림자의 길이를 표시하고 측정한다. 이 관측으로부터 하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는데, 첫날 그림자가 정북의 방향에 떨어진 때부터 다음 날 그림자가 다시 정북에 떨어지는 때까지의 시간이 하루의 길이가 된다.

한 해의 길이를 정하려면 오랫동안 계속해서 해 그림자의 길이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태양의 고도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날마다 정북에 떨어지는 그림자의 길이는 조금씩 변한다. 오랫동안 측정 데이터를 모아 보면 해 그림자의 길이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가 하지, 가장 긴 때가 동지이다. 한 해의 길이는 하 지나 동지로 확정한 그림자의 길이와 일치하는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는 때까지의 시간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101)전통 천문학에서 동지점을 측정하는 방법과 수학적 취급에 대해서는 이은성, 앞의 책, 13∼18쪽 참조.

이와 같은 방법에 따르면 한 해의 길이는 가장 짧거나 가장 긴 그림자를 갖는 두 날의 시간 간격으로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1년의 정확한 길이를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다. 먼저 해 그림자의 측정 오차는 정확한 한 해의 길이를 정하는 데 피할 수 없는 방해 요소이다. 지면이 조금만 왜곡되어 있거나 기울어 있어도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측정 면을 완전한 수평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측정 면에 물을 채우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수평(水平)을 맞추는 것이다. 그림자 길이 측정용 자를 물에 띄워 정확한 수평면을 만들고, 여기에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면 더욱 정확하게 그림자를 잴 수 있다.

또 다른 방해 요소는 태양이 한 점이 아니라 크기를 지닌 천체라는 점이다. 노몬의 그림자는 자세히 보면 끝의 윤곽이 선명하지 않고 부옇게 번져 있다. 이는 태양의 윗부분이 만드는 그림자와 중간부분, 아랫부분이 만드는 그림자가 서로 겹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선명한 그림자를 얻는 방법이 여러모로 고안되었다. 중국에서는 50m가 넘는 높이의 큰 노몬을 만들어 측정하고, 노몬의 끝에 세로로 보를 두어 정확도를 높이려 하였다. 혹은 바늘구멍 슬릿(slit)을 이용해서 태양의 윤곽을 정확히 측정하여 정확도를 높이기도 하였다. 그림자 측정 면에 바늘구멍을 뚫어 놓고, 그 아래에서 노몬의 끝과 태양을 일직선으로 관측해서 정확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해 내는 것이다.

많은 관측상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관측을 통해 한 해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흔히 한 해의 길이가 365.2422일이라고 알려져 있듯이 한 해의 길이는 하루의 정수배(整數倍)가 아니므로, 정오에 측정한 그림자의 길이가 동일한 두 날은 본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같은 하짓날 정오라고 하더라도, 떨어지는 그림자의 길이는 결코 일치 하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태양은 지구가 공전함에 따라 황도(黃道) 상을 이동해 가는 것으로 관측되는데, 이 황도 상의 최고점이 바로 하지점이다. 그런데 이 점은 지구 시간으로 정확히 정오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정확한 하지점의 위치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관측에 덧붙여 관측할 수 없는 때의 황도를 얻어 내는 수학적 고안이 필요하다.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한 해의 길이를 정확하게 얻어 내는 방법은 계속 개선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관측의 정밀성을 높이는 기계적 고안뿐만 아니라 수학적 고안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하루의 길이와 한 해의 길이가 정해지면, 이를 기준으로 시간 간격을 나누어 간단하게나마 달력을 만들 수 있다. 하루의 길이를 좀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시간을 정하면 하루 중의 시간이 생기게 되고, 이 하루를 여러 개 모아 1년을 삼으면 간단한 달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의 길이를 한 달의 길이와 한 해의 길이에 연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한 달과 한 해의 길이가 정확히 하루 길이의 정수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법상의 복잡한 각종 규칙은 바로 하루라는 기본적인 시간 단위를 정수배로 떨어지지 않는 그보다 큰 한 달이나 1년에 연장하여 맞추려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또한, 1년이라는 시간은 그보다 작은 한 달이라는 시간의 정수배가 되지 않으므로, 한 달과 1년을 연결시킬 때에도 동일한 문제가 생겨 각종 역법 규칙이 요구된다. 윤일(閏日), 윤월(閏月), 윤년(閏年) 등은 모두 서로 정수배가 되지 않는 다른 시간 단위를 한데 조화시키려는 역의 본질상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고안인 것이다.102)역법에 사용되는 시간 단위들의 천문학적·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은성, 앞의 책, 177∼24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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