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1. 땅에 대한 다양한 관념
  • 추연의 대구주설
오상학

중국에서는 중화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외에 불교의 사대주설과 더불어 추연(騶衍, 기원전 305?∼240?)의 대구주설 (大九州說)이 있었다. 추연은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음양가(陰陽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학설이 많은 제후국에 알려지면서 각국의 제후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그의 저작으로 『추자(鄒子)』 49편, 『추자종시오덕(鄒子終始五德)』 56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의 학설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이 주로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여씨춘추』 「응동(應同)」 등에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112)송영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 현음사, 1994, 458쪽. 다음은 『사기』에 수록된 추연의 지리적 세계관과 관련된 내용이다.

유자(儒者)들이 말하는 중국은 전체 천하의 81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 하였는데 그 안에 구주(九州)가 있다. 우(禹)가 정한 구주가 바로 이것인데 주(州)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의 밖에는 적현신주 같은 것이 아홉 개가 있는데 이것이 구주인 것이다. 여기에는 비해(裨海)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어서 인민(人民)과 금수가 서로 통할 수 없다. 하나의 영역과 같아서 하나의 대륙을 이루는데 이와 같은 것이 아홉이다. 대영해(大瀛海)가 그 밖을 둘러싸고 있는데 천지가 만나는 곳이다. 그의 학술은 모두 이러한 유(類)였는데 그 귀착됨은 반드시 인의절검(仁義節儉), 군신상하(君臣上下), 육친(六親)의 베풂에 그쳤고 처음에만 장황하였을 뿐이다.113)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7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추연은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전체를 적현신주라 하고, 이것과 똑같은 여덟 개가 더 합쳐져서 하나의 주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공의 구주는 전체 대구주(大九州)의 81분의 1이 되는 셈이다. 세계는 전체 아홉 개의 큰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대륙을 비해가 감싸고 있으며, 이 전체를 대영해가 에워싸고 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방위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중국의 위치가 전체 지리적 세계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분별할 수 없다.

확대보기
추연의 대구주설
추연의 대구주설
팝업창 닫기

추연의 대구주설은 유교의 구주설을 확대시킨 관념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구주설과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서경』의 「우공」에 보이는 구주설은 추연의 경우처럼 여러 대륙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 중화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어 구주를 대륙의 중심에 위치시켰고, 그 외부에는 이민족이 거주하는 이역(異域)이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추연의 사고에서는 문명화된 지역인 중국을 전체 세계의 81분의 1로 축소시켰고, 중국 자체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명백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화적 세계관인 「우공」의 구주설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추연의 대담한 세계관은 중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타 문화와의 접촉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추연의 대구주설에서는 각각의 아홉 대륙이 해양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인도의 지리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고 말해진다. 특히, 곤륜산(崑崙山)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고, 적현신주의 위치가 중화적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 인도로부터의 영향을 상정하기도 한다.114)高橋正, 「中國人的世界觀と地圖」, 『月刊しにか』 6-2, 大修館書店, 1995, 26쪽. 이처럼 추연의 대구주설은 하나의 문화권에서 독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문화의 전파에 의해 중국의 토착적인 요소와 외부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나타난 지리적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대구주설은 이후 중국 사회에서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고, 실용적 인 측면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이단(異端)의 설로 배척하였다. 특히, 유교의 경전에서는 이러한 설에 대한 성현의 언급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전을 숭상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연의 대구주설은 서양의 세계 지도가 중국에 전래되어 종전의 지리적 세계 인식이 확대되어 가던 시기에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하지만 추연의 대구주설은 여전히 이단의 설로 배척되곤 하였다. 명말(明末)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01)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 서문을 썼던 오중명(吳中明)은 서양의 지리 지식을 수용하면서도 추연의 설은 굉대(宏大)하고 불경(不經)하다고 하여 배척하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