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2. 세계 지도, 세계관의 표상
  • 열린 세계의 지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오상학

[2. 세계 지도, 세계관의 표상]115)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의 세계 지도와 세계 인식』의 제2장 2·3절 부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혀 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지도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현존하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중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세계 지도도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는 1402년(태종 2)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 지도는 조선 왕조 개국 초기 국가적 프로젝트로 제작되었다. 중국, 일본 등의 인접 국가로부터 최신의 지도를 입수하여 조선에서 새롭게 편집·제작한 것으로, 이후에도 꾸준히 모사(模寫)와 수정 작업을 거치면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세계 지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 여러 사본이 남아 있는데,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서구에도 널리 알려졌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 지도가 그려 낸 공간이 동아시아를 넘어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유럽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가 제작된 1402년을 전후한 시기는 유럽에서 스페인·포르투갈에 의한 대항해 시대(大航海時代)의 막이 열리기 직전이었으 며, 지도학사적으로는 탁월한 고대 톨레미(Ptolemy)의 세계 지도가 재생되기 이전이었다. 이 시기 세계 지도로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중세 유럽의 세계 지도(Mappa Mundi)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시 가장 뛰어난 지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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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모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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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세계 지도가 극동에 위치한 조선에서 어떻게 하여 제작될 수 있었을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지도의 하단에 있는 권근(權近, 1352∼1409)의 지문(誌文)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지문의 전문이다.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 모른다. 이를 축소해서 몇 척의 길이로 그리려면 상세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려진 지도가 대부분 소략하다.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가 매우 자세하고, 역대 제왕의 연혁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잘 수록되어 있다. 건문(建文) 4년(1402)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과 우정승 단양 이무(李茂)가 섭리(燮理)의 여가에 이 지도를 연구한 후, 검상 이회(李薈)에 명하여 자세히 교정하고 합쳐서 하나로 만들게 하였다. 요수(遼水)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이택민의 지도에도 많이 누락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지도를 증보하고 일본을 첨부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집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 지도와 서적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정치에 도움이 된다. 두 정승이 이 지도에 몰두하였던 것을 통해 그분들의 도량이 넓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재주가 없으나 참찬(參贊)을 맡아 두 분의 뒤를 따랐는데, 이 지도의 완성을 바라보게 되니 심히 다행스럽다. 내가 평일에 방책을 강구하여 보고자 하였던 뜻을 맛보았고, 또한, 후일 집에 거처하며 와유(臥遊)하려 하였던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한다. 이에 지도의 하단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해 가을 8월 양촌 권근이 씀.116)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권22, 발어류(跋語類),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제작은 1402년 여름에 의정부의 고위 관료가 참여하는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가 중국에서 들여온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검토하고, 검상 이회로 하여금 조선과 일본 지도를 합쳐 편집하여 하나의 지도로 만들게 하였다. 권근은 김사형과 이무의 보좌 역할을 담당하였고, 앞의 지문을 쓰기도 하였다. 지도 제작의 실무는 이회가 맡았는데, 그는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던 당대의 뛰어난 지도 제작가였다.

그렇다면 왜 1402년이라는 조선 왕조 초기에 국가적 사업으로 세계 지도를 제작하려 하였을까? 이는 지도의 성격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권근의 지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지도와 서적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인식은 고대부터 지녔던 생각이다. 지리는 천문과 더불어 국가를 경영하는 기초 학문으로 중시되었다. 천문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하여 정확한 역(曆)을 제작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지리는 국토의 지형·지세·토지·인구·물산을 파악하여 국정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러러 천문을 보고 아래로 지리를 살핀다(仰以觀天文附以察地理).”고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는 개국 초기 1395년(태조 4)에 국가적 사업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이처럼 천문과 지리 분야에서 국가적 사업이 추진된 것은 국가 경영의 실용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왕조의 개창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이념적인 목적도 크게 작용하였다. 천문도의 제작에는 하늘의 성좌(星座)를 측정하여 별자리의 도수(度數)를 정확하게 밝히려는 과학적·실용적 측면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뜻에 따른 선양(禪讓)이었음을 강조하는 이념적 측면이 짙게 깔려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 지도에도 단순히 세계의 형세와 모습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이 개창된 조선 왕조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아프리카·유럽 대륙에 비견되는 크기로 조선을 표현함으로써 문화 대국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도에는 중앙에 중국이 포진하고 있고 동쪽으로 조선, 남쪽 바다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유럽 대륙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세계 지도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그려진 모습이 객관적 실재와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서양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투영된 세계 지도에 비해서는 훨씬 사실적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유럽 대륙을 어떻게 해서 그릴 수 있었을까? 당시 조선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실제로 조선이 아프리카나 유럽 지역에 갔던 경험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대외 교류가 활발하였던 고려시대의 세계 지도를 기초로 제작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것들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서양에 소개되면서 지도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가장 먼저 제기하였던 의문이다.

앞서 기술한 권근의 지문에서도 보이듯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에서 수입한 두 장의 지도, 즉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기초로 하고, 최신의 조선 지도와 일본 지도를 결합·편집하여 만든 세계 지도이다. 이 가운데 성교광피도에는 중국 이외의 지역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혼일강리도는 중국 역대 왕조의 강역과 도읍이 상세히 수록된 지도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유럽과 아프리카 부분은 성교광피도의 것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원나라 때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족이 세운 원 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확보하여 유럽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서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넓은 사라센 제국(Saracen帝國)을 통치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성지 순례·교역 등의 필요에서 지리학과 지도학이 발달하였다. 지도학은 로마시대의 선진적인 톨레미 지도학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칼리프(Caliph)의 후원에 의해 톨레미의 저서들이 번역되었다. 알 이드리시(al-Idrish) 같은 학자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을 기초로 원형의 세계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진적인 이슬람 지도학은 동서 문화 교류에 의해 중국 사회로 전파되었고, 중국에서는 다시 이택민과 같은 학자에 의해 중국식 지도로 편집·제작되었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수록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습은 중국을 거쳐 들여온 이슬람 지도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에 그려진 나일강의 모습과 지명들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하에서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세계관은 서로 다르다. 이슬람 지도학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도학을 계승한 것으로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둥근 지구를 상정한 원형의 세계 지도가 많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여전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전통적인 천원지방의 천지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부의 이슬람 지도에서 보이는 경위선(經緯線)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다. 지도의 형태도 원형이 아닌 사각형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천원지방이라는 전통적인 천지관에 기초하여 제작된 지도이지만, 중국의 중화관에 기초한 화이도와도 다소 차이가 있다. 즉, 화이도에서는 중국과 직접적인 조공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만 주변에 그리고, 조공 관계가 없는 나머지 나라들은 삭제하거나 수록하더라도 지명만 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던 유럽·아프리카 대륙까지 영역을 확대하여 그려 냈다. 원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100여 개의 지명이 표기된 유럽 지역, 35개의 지명이 표기된 아프리카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달리 주 변 지역의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은 중국 문화를 계승한 소중화(小中華)로 표상된다. 다만 16세기 이후 나타나는 경직된 대외 인식과 달리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지도에서도 반영되어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까지 자세히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도는 현존하지 않고, 이후에 필사된 사본만이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사본이 몇 점 있으나 국내에는 없고, 모두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본은 15세기 후반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류코쿠(龍谷)대학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가장 대표적이고,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대명국도(大明國圖), 구마모토(熊本) 혼묘우지(本妙寺)에 소장된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 그리고 1988년에 발견된 것으로 사마바리시(島原市) 혼코우지(本光寺)에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이다. 이들 사본은 일본과 유구국(琉球國) 부분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 등은 대부분 유사하여 동일 계열의 사본임을 알 수 있다. 일찍부터 일본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근래 본격적으로 서구 사회에 소개되었는데, 1992년 미국에서 열린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 지도 전시회에 출품되어 많은 찬사를 받았다. 또한, 1994년 간행된 『The History of Cartography』 시리즈의 아시아 부분 표지에 수록되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들이 서구 학계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96년 말 호암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조선 전기 국보전’에 출품되어 일반인들에게 소개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중요한 과학 문화재로 인식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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