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3. 국토 경영과 지도 제작
  • 지도의 제작 방법
오상학

고대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의 관념을 지녀 왔다. 이에 따라 둥근 지구를 전제로 하였던 서양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도학적 전통과는 달리 네모지고 평평한 땅을 전제로 하여 지도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도 제작의 강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둥근 지구를 전제로 하는 투영법(投影法)이 나타날 수 없었다. 또한, 위도와 경도의 측정에 기반한 경위선이 지도 제작에 활용된 사례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지도 제작을 위한 측량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과학의 수준에서 서양과는 다르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측량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140)오상학, 「조선시대 지도 제작의 문화적 특성」, 『국사관논총』 107, 국사편찬위원회, 2005.

무엇보다도 조선시대의 지도 제작은 다양한 전문가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협동 작업이었다. 특히, 실지 측량에 기반한 지도 제작의 경우, 지형과 지세를 잘 살필 수 있는 지관(地官)과 중요 지점 간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산사(算士)의 참여가 종종 이루어졌다. 최초 지도의 제작이 실제 현장의 측량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측량에 대한 이해는 전통시대 지도의 정량적·과학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지도 제작을 위한 측량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또한, 현존하는 측량 기구도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측량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단지 현존하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당시 측량의 모습을 대략 파악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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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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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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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측량의 대상과 관련된 것인데, 이는 지도에 표현될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다. 지역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형세가 먼저 파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산줄기와 물줄기의 내거(來去)와 교착(交錯)을 세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각 지점까지의 거리와 방위가 측정되어야 한다. 현대 지도처럼 등고선(等高線)의 개념이 없던 전통시대 지도에서는 산의 높이를 측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다. 일부 산성의 축조나 건물을 지을 때 제한적으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지형과 지세를 잘 파악하는 지관은 산천의 내거와 교착을 파악하는 일을 담당하는데, 나침반(패철)을 사용하여 방위를 결정하기도 한다. 계산에 정통한 산사는 지역 간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러한 측량은 지역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 정상과 같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측량에는 여러 가지 기구도 사용하였는데, 가장 흔히 쓴 것은 나침반이었다. ‘패철(佩鐵)’이라 불리는 나침반은 방위를 판정하는 데 풍수가(風水家)가 주로 사용하였으나, 천문학자가 휴대용 해시계의 정확한 자오(子午, 남북) 방향을 판정하는 데도 많이 이용하였다. 동양에서는 이미 9세기에 지자기의 편각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방위의 측정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거리를 측정하는 데는 주로 줄(繩)을 이용하여 재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기리고차(記里鼓車)라는 수레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기리고차는 조선에서 고안된 것은 아니고, 이미 3세기 중국 진대(晉代)에 주행 거리를 재는 장치로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당시 천자의 행렬에는 지남차(指南車)와 비슷한 축제용 장식 수레가 몇 대 있었는데, 그 중 주행 거리를 재던 기리고차도 있었다.141)전상운, 『한국 과학 기술사』 제2판, 정음사, 1988. 그러나 거리를 측정할 때 이러한 기리고차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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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고차의 복원도
기리고차의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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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측량하는 기기로는 인지의(印地儀)와 규형(窺衡)이 사용되었다. 인지의는 세조 때 만든 것인데, 일반적으로 땅의 원근을 재는 기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종 때 구궁(九宮)의 방위를 측정하는 데 인지의를 사용하는 것으로142)『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병진. 보아 풍수의 좌향 판단에 사용하였던 기기로 보인다. 세조는 직접 인지의의 사용법을 신하들에게 강하도록 하였고, 영릉에 가서 인지의로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143)『세조실록』 권41, 세조 13년 3월 계미. 규형은 특정 지점의 높이를 측정하던 기기로 보이는 데, 지도 제작과 관련해서는 그리 많이 활용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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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의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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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땅의 측량과 아울러 북극 고도의 측량도 행해졌다. 일찍이 세종 때에 역관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이무림(李茂林) 등을 마니산·백두산·한라산에 파견하여 북극 고도를 측정하게 하였으나 측정치는 전해지지 않는다.144)『서운관지(書雲觀志)』 권3, 고사(故事). 이러한 북극 고도의 측정은 지도 제작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고, 각 지역의 절기와 시각을 측정하여 정확한 역법을 만드는 데에 필요하였다. 천원지방에 입각하여 평평한 땅을 전제로 하는 한, 경위도의 측정에 의한 지도 제작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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