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3. 국토 경영과 지도 제작
  •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전도
오상학

조선 전기에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국토의 확장으로 행정적·군사적으로 최신의 지도 제작이 요구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압록강 상류에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두만강 하류에 육진(六鎭)을 개척함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파악이 절실하였다. 이에 따라 1424년(세종 16)에는 구체적인 지도 제작에 착수하였는데, 그 시작은 국경이 확대된 현재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이었다. 정척(鄭陟, 1390∼1475)은 1451년(세종 43)에 함경도와 평안도에 해당하는 양계(兩界) 지방의 지도를 제작하였고, 1463년(세조 9)에는 양성지와 같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하였다.

동국지도는 원본이 전해지지 않으나, 사본 또는 같은 유형의 지도로 추정되는 지도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지도는 제작자와 제작 연대가 밝혀진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전도(全圖)이다.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하던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지도로, 대마도 종가(宗家)에서 보관해 오던 것을 1930년대에 조 선사 편수회에서 종가 문서의 일부로 구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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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방역지도
조선방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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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지도의 구도는 상단에 제목, 중간 부분에 지도, 하단에 제작에 참여한 제용감 관원의 명단을 수록한 좌목(座目)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문인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기록한 계회도(契會圖)에서 볼 수 있는데, 지도와 회화 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한반도의 지형 표현은 중·남부 지방이 비교적 정확한 반면에 북부 지방은 부정확하다. 만주 일대도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개방적 영토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면 하계망(河系網)이 비교적 정확하고, 산줄기는 풍수적 지리 인식에 기초하여 연맥(緣脈)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정척·양성지의 지도 유형은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동국지도가 출현할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소축척 지도로 민간에서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도로 동람도(東覽圖)를 들 수 있다. 동람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부도(附圖)인데, 인쇄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세종대 이후 관찬 지리지(官撰地理志) 편찬 사업의 결실로 나타난 것인데, 1481년(성종 12)에 완성되었다. 이후 여러 번에 걸친 개찬(改撰)과 증보(增補)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전 55권으로 증보 간행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62년에 간행된 중국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체제와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중국전도와 13성의 지도를 부도로 삽입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를 모방하여 팔도총도(八道總圖)와 팔도의 지도를 부도로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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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총도
팔도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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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람도는 지지(地誌)를 보완하는 부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표현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지지에 이미 많은 내용이 지역별로 수록되어 지도에서는 단지 지역의 개략적인 모습만 보여 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한, 규격이 작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지도에 많은 정보를 담을 수도 없었 다. 무엇보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은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지리지가 지니는 성격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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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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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같은 이전 시대 지리지는 국가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지역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강하였기 때문에 군사·행정·경제 등과 같은 실용적 측면에 비중을 두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전국적 지배 체제의 확립 이후 왕권의 위엄과 유교적 지배 원리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우세하여 시문(詩文)·인물·예속(禮俗)·고적 등과 같은 항목이 강화되었다. 동람도에도 이러한 지지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팔도총도에는 사전(祀典)에 기재되어 있는 악(嶽)·독(瀆)·해(海)와 명산 대천(名山大川) 등을 표시하였고, 팔도의 각 도(道) 지도에는 주현의 진산(鎭山)과 사지사도(四至四到)만을 표시하였다. 국토의 산천 파악이 국방과 같은 실용적 차원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왕권의 위엄과 유교적 지배 이념을 확립하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동람도는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었다. 목판본뿐만 아니라 필사본 지도도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동람도의 도별도를 보면, 수계(水系)를 중심으로 하여 각 주현의 진산을 배치하였고, 산의 모습도 『대명일통지』에 보이는 것처럼 독립적인 산봉우리의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바다는 중국 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결 모양의 수파묘(水波描)로 채웠다. 산천과 바다를 청색으로 채색하고, 군현명(郡縣名)에도 약간의 채색을 가미하였다. 특히, 여백에는 해당 도의 관원과 병영(兵營)·수영(水營)·역도(驛道)·진보(鎭堡) 등의 위치를 주기(注記)하였다. 또한, 서울로부터 각 군현까지의 일정과 더불어 도로를 붉은 선으로 그려 넣었다. 이는 원래의 동람도 자체가 실용적인 측면이 약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러한 주기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람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많이 보급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도보다 대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다소의 변용을 거치면서 후대에 계속 이어져 내려와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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