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4. 지리지, 국토 정보의 체계적인 기술
  • 관찬 지리지의 간행
오상학

지리지는 지지(地誌, Regional Geography)라고도 불린다. 지리지와 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지만, 지리지는 전통시대의 지리적인 기록까지 포괄하는 반면 지지는 서양에서 지리학이 학문으로 성립된 이후 지역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넓은 의미의 지리지는 여행 안내기나 산천 잡기(雜記)로부터 이론적이고 전문적인 지리서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한다. 좁은 의미의 지리지는 특정 지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기록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지리지를 협의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관찬 지리지가 저술되었지만, 사서(史書)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독자적인 저술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이전의 지리서로는 고려 인종 때 간행된 『삼국사기』와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사』에 수록된 지리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지리지는 역사서의 부록으로서, 역사 이해의 보충적인 자료에 불과하여 지역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라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잡지(雜志)의 권34에서 권37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신라의 행정 구역별 연혁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이어 고구려·백제의 행정 구역과 연혁이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행정 구역의 연혁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어서 그 밖의 인문적·자연적 내용은 거의 없다.

『고려사』의 「지리지」는 제56권에서 제58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지(志) 부분으로는 10, 11, 12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와 마찬가지로 고을의 연혁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연혁 이외에도 일부 고을에는 유명한 역사 유적이나 명산, 도서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삼국사기』 「지리지」보다는 정보량이 많은 편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국가의 기초가 확립되고, 사회 질서도 안정됨에 따라 국토의 확장, 국가 재정의 확보, 국방 태세의 확립 등을 통해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초 자료로 활용하는 일은 국가의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역사서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지리서가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로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1432)와 『세종실록지리지』(1454), 양성지의 『팔도지리지』(1478),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리지는 조선 초기 국가적 사업으로 간행된 전국 단위 지리지인데, 『신찬팔도지리지』와 『팔도지리지』는 현전하지 않고 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1432년(세종 14) 맹사성(孟思誠) 등이 진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관찬 지리지가 된다. 이 지리지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1425년에 작성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통해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경상도지리지』를 보면 13개의 규식(規式)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군정(軍 政)·조세(租稅)·공부(貢賦) 등의 내용이 상세하다. 특히, 국방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 것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남북으로 외침이 잦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종대 이후 추진된 북진 정책의 영향이 컸던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세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에서 기왕의 지리지를 실록에 첨재(添載)하자는 논의에 따라 부록(附錄)한 것이다. 이 지리지는 한 국가를 통치하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국가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으로, 같은 의도로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신찬팔도지리지』를 수정·증보한 것이다. 세종대는 조선 왕조 초기의 지배 질서가 크게 자리 잡혀 가는 시기로서, 대내적으로는 제반 문물 제도의 정비, 대외적으로는 영토의 확정 등 정치·경제·군사에 대한 자료의 전국적인 실태 파악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역시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지리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기재 내용이 정확하다는 점이다. 내용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 숫자와 통계를 중시하여 인구·거리·면적 등을 정확한 숫자로 표시하였다. 둘째, 지역성의 파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즉, 해당 지방의 특이한 지리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토양과 기후 조건까지 조사하여 수록하였다. 셋째, 산업을 중요시하였다. 서술된 항목 중 산업에 관한 항목이 비교적 많이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목장(牧場)·철장(鐵場)·염소(鹽所)·어량(漁梁)·약재(藥材)에 관해서는 후대의 여러 지리서에서는 물론 현대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넷째, 항목별로 살펴보면 자연 환경과 인문 경관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이 지리지는 질적으로 내용이 풍부해서 후대의 지리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문 지리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수정·보완은 지리지가 완성된 이듬해인 1455년 (세조 1)에 구체화되어 양성지에게 지리지를 찬(撰)하고 지도를 그리게 함으로써 실천에 옮겨졌다. 전국적으로 새로운 조사를 실시하여 전지(前志)와 대조하면서 재정리된 것이 양성지의 『팔도지리지』인데 현전하지 않는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는 『팔도지리지』 편찬에 필요한 지방 자료의 모음이었는데, 이를 통해 『팔도지리지』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는 앞서의 『경상도지리지』가 발간되고 나서 약 44년이 지난 1469년(예종 원년)에 찬진(撰進)되었는데, 앞서의 지리지보다 정보량이 훨씬 많다. 즉, 『경상도지리지』가 12항목인 데 비하여 항목이 29개로 늘어났으며, 인문 지리 방면, 특히 경제에 관한 항목이 많아졌다. 또한, 국방에 관한 항목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양계의 절도사 본관의 연혁(沿革) 및 양계 연안(沿岸)의 각 진, 야인 소재(野人所在)를 비롯하여 강무장(講武場)·연대(煙臺)·봉화(烽火) 등은 그 예이다. 그러나 국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호구(戶口)·공물(供物)의 항목이 없어진 대신 누대(樓臺)·제영(題詠)·승사(僧寺) 등과 같은 예속 항목이 더해졌다. 무엇보다 이전 시기의 지리지에 비해 새로워진 점은 지도를 삽입한 사실이다. 양성지는 지리지에 팔도주군도(八道州郡圖), 팔도산천도(八道山川圖), 팔도도(八道圖), 양계도(兩界圖) 등을 붙임으로써 지도를 결합하는 지리지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냈다.

세조대를 거치면서 통치 기반이 확고해지고, 유교 문화가 정착되어 갔기 때문에 지리지의 편찬 의도도 점차 달라져 갔다. 즉, 『세종실록지리지』와 비교해 보면 예속조의 내용이 충실해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념적 내용의 비중이 커졌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이 시기 관찬 지리지의 결정판인 『동국여지승람』이다. 성종의 뜻에 따라 양성지의 『팔도지리지』에 우리나라 문사(文士)의 시문인 동국 시문(東國詩文)을 모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에 일차 완성하였다. 전 50권으로 이루어진 『동국여지승람』은 명나라의 『대명일통지』에 자극을 받아 찬수된 것이지만, 체제는 사 실상 송나라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이후 『동국여지승람』은 성종대와 연산군대에 수정 작업을 거치고, 중종대에 새로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 55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145)서인원, 『조선 초기 지리지 연구-『동국여지승람』을 중심으로-』, 혜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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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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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은 경도·한성·개성·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함경도·평안도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으며, 맨 처음에 팔도총도 그리고 각 도의 처음에 도별 지도를 삽입하였다. 수록된 항목을 보면, 대체로 건치 연혁·군명(郡名)·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관방·봉수(烽燧)·궁실(宮室)·누정(樓亭)·학교·창고·역원(驛院)·불우(佛宇)·사묘(祠廟)·고적·명환(名宦)·인물·제영(題詠) 순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지리서였던 만큼 경제적·군사적 측면보다는 문화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전 시기 지리지에 수록되었던 교통·산업·인구·호구 등의 내용이 빠지고,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인물(열녀, 효자 포함) 항목과 제영 같은 시문 항목이 전체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당시 국내의 관계 자료를 총망라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수정·보완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둘째,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적 편제는 15세기에 기초가 정해졌는데, 이 시기 지지의 결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과거 역사 지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셋째, 당시 산업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책에서는 각 지방의 토산(土産) 항목에 270여 종의 산물이 기록되어 있다. 넷째, 억불숭유(抑佛崇 儒)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불우 항목을 넣은 것은 사찰에서 복을 비는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다. 이 밖에도 군사 시설의 배치, 국경 지대의 경비, 유용 광산물의 산지, 각 지방 풍속 기질의 비교, 교통의 요지 등 현대와 비교 연구할 만한 점이 많다. 따라서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지리지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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