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2.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의 풍수지리
  • 한국 풍수지리의 기원
임종태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 사상이 언제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사람들의 거주지와 조상의 묏자리를 좋은 곳에 선택하려는 노력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선사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생적인 지식을 곧 엄밀한 의미에서의 풍수지리라고 볼 수는 없다. 음양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땅의 기를 판별하고, 이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독특한 이론 및 실천 체계로서 풍수지리는 중국에서 위진남북조에 걸쳐 수나라·당나라 시기에 체계화되었다. 그 지식이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던 것이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도 풍수지리가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점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고려 이후로 널리 퍼진 설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풍수는 통일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 827∼898)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당시의 유명한 술사인 일행(一行, 683∼727)에게서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것이다. 1세기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생몰 연도를 감안하면 이 이야기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동방 풍수의 비조(鼻祖)이자 고려 건국을 예언하였다고 알려진 도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중국의 저명한 술사인 일행의 이름을 빌린 점 자체가 우리나라의 풍수가 중국의 것을 받아들여 형성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확대보기
최치원 초상
최치원 초상
팝업창 닫기

실제로 풍수지리 학설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도선이 활동하던 9세기보다 훨씬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삼국은 경쟁적으로 중국의 제도와 학술을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풍수지리와 그 이론적 토대를 같이하는 천문학, 의학, 음양 술수의 분야가 도입되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따르면, 602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일본에 ‘천문 지리서(天文地理書)’와 ‘둔갑 방술서(遁甲方術書)’를 가지고 가서 서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의 ‘지리’란 오늘날과 같은 인문 자연 지리 또는 지도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풍수지리 자체를 뜻하거나 적어도 이를 포함하는 술법 지식이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151)전용신(田溶新) 옮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일지사, 1989, 382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운 문무왕릉이나 김유신 묘에 풍수의 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이론이 실제 적용되었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헌 증거로는 통일신라 말기의 유명한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이 처음이다. 이 비문에서 최치원은 798년에 원성왕 이 죽은 직후 왕릉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중국 풍수설의 비조로 알려진 청오자(靑烏子)의 이름과 그 학설을 거론하는 등 풍수지리의 원리가 신라 왕실에서 거론되고 또 이용된 정황을 전하고 있다. 적어도 8세기 말이 되면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풍수지리의 이론이 받아들여지고 장지(葬地)의 선택에 이를 이용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152)이기백, 「한국 풍수지리설의 기원」, 『한국사 시민 강좌』 14, 일조각, 1994, 5∼9쪽.

그렇다면 왜 고려 이후에 이르러 동방의 풍수지리가 도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을까? 이러한 설화는 비록 사실은 아니지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던 시기 우리나라 풍수지리에서 일어난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도선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의 위치와 역할이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즉,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전 경주의 왕실과 귀족 사회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풍수지리설이 호족 세력이 포진하고 있던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더 나아가 통일신라 말기의 정치 사상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도선이라는 인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