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3. 고려의 정치와 풍수 도참
  • 무신 정권 시기의 풍수지리
임종태

묘청의 난을 기점으로 풍수지리와 밀접히 연결된 고려의 정치 문화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남경을 비롯한 명당에 궁궐을 건설하여 고려의 국운을 연장하려는 시도나 비보 시설의 건설은 계속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고려 전기에는 보이지 않던 이색적인 시도가 전국적인 비보 풍수를 실시한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노력이었다.

고려가 무신 정권기로 접어든 이후인 1197년(신종 1)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최충헌은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 관청은 전국에 걸쳐 산천의 순역을 조사하여, 배역의 형세를 지닌 곳에 그 나쁜 기운을 억누를 수 있는 비보 시설을 설치하는 임무를 띠고 있 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무수히 설치된 사탑 가운데에서 비보의 원리에 어긋난다거나 지맥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철폐하는 일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최충헌이 이러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신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명종부터 신종까지의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민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중에는 옛 신라의 도읍인 경주 지방에서 일어난 수차례의 반란처럼 “고려의 국운이 쇠하면 신라가 다시 흥하리라.”는 참위적 주장에 근거한 경우도 있었다. 최충헌은 이러한 민란을 정치적·군사적 방편으로 제압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이유가 해당 지역의 산천이 지닌 배역의 형세에 있다고도 판단하였다. 이는 고려 초에 태조 왕건이 후백제 지역의 불온한 풍수를 경계하였던 것과 유사한 생각이었다. 최충헌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정치적·군사적 방법은 물론 산천의 불온한 지세를 억누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산천비보도감을 설치하여 이후 12년간 풍수지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지역에 인공적으로 산을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비보 풍수를 실시한 것이다.166)이병도, 앞의 책, 272∼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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