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4. 고려 말 조선 초에 일어난 변화
  • 조선 초기의 풍수 일상화
임종태

풍수지리에 대해 유교적 합리주의가 승리한 한양 천도 논란을 계기로, 조선 초기에 풍수지리가 결정적 타격을 입고 쇠퇴하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우선 도읍을 정하는 데 풍수지리에 의존하는 일에 비판적이었던 이들도 풍수의 원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풍수지리 사상과 그 바탕이 되는 음양오행의 이론은 성리학에서도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요점은 성리학이 현실주의적 태도로 인해 음양오행 이론과 술수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나라의 치란과 흥망성쇠는 단지 음양오행이나 풍수에 의해 간단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관건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마음과 노력에 달려 있었다. “치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땅에 성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정도전의 선언은 바로 그러한 유교의 합리주의 또는 실용주의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선언은 풍수지리 자체의 폐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성리학과 풍수지리 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봄이 적절할 것이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 풍수지리적 고려가 유교적 정치 윤리와 원칙을 누 르고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도 풍수지리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지만, 고려시대와 같은 정치적 파급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예를 들어 1433년(세종 15) 서울의 주산(主山)을 북악(北岳)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늘날의 종로 3가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여러 정치·경제의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지만, 풍수지리는 궁정과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여전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풍수의 기본 원리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 그리고 조상의 묘를 좋은 곳에 쓰는 것을 효도의 실천으로 간주한 유교의 영향으로 풍수지리는 한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천문 지리를 담당하는 관서인 관상감에서는 풍수지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었고, 풍수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제도를 갖추었다. 이들 궁정의 풍수 전문가들은 장지(葬地)의 선정을 비롯한 궁정의 다양한 일상적 의례에 깊이 관여하였다. 양반 가문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삶에도 조상의 묘를 정하는 음택 풍수의 실천이 깊이 스며들었다.170)조선 초기 풍수에 관한 간략한 논의로는 최창조,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민음사, 1993, 57∼62쪽을 참고. 어떤 점에서 보자면, 고려시대와는 달리 불안정한 정치적 논쟁의 소용돌이를 떠나 안정된 일상으로 후퇴함으로써 조선시대의 풍수지리는 고려시대보다 더욱 확고한 사회적·문화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일상에 자리 잡고 성행하였던 풍수지리는 고려시대와는 다른 종류의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이는 실학자(實學者)라고 불리는 개혁적 유교 사상가들의 합리적 비판을 받게 될 것이었다. 마치 고려시대 풍수 도참 사상의 정치적 폐단에 대해 김부식, 정도전 등이 유교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며 반대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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