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1. 장시의 성립과 농촌 경제의 변화
  • 농촌의 정기 시장, 장시의 성립
김대길

장시는 상인, 그리고 각 지방의 농민·수공업자 등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 생산과 이들 서로 간에 직접 교역이 이루어지는 농촌의 정기 시장이다. 조선시대 장시는 15세기 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장시는 장문(場門) 또는 향시(鄕市)·허시(墟市)라고도 하였는데, 조선 초기에는 장문으로 많이 일컬었다. 향시는 경시(京市)의 상대적인 뜻에서 붙인 이름이고, 허시는 사람들이 모여서 거래를 마친 후 흩어진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장시는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개설되었다. 장시를 개설하려고 한 곳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나주 목사가 장시 금압(場市禁壓)을 반대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나주를 비롯한 인근의 몇몇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주는 장시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영산강을 가운데 낀 평야 지대에 위치한 나주는 농산물을 비롯하여 해산물도 풍부하여 남쪽 지방에서는 가장 큰 곳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1472년(성종 3)에는 무안(務安) 등 여러 고을에 장시가 개설되고 있었 다. 관찰사 김지경(金之慶, 1419∼1485)은 장시가 개설된 이후 변화하고 있는 농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도내 여러 고을의 인민이 그 고을 거리에서 장문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 데 비록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나 근본을 버리고 말(末)을 따르는 것이며, 물가가 올라 이익은 적고 해가 많으므로 이미 모든 고을로 하여금 금지하라고 하였습니다.1) 『성종실록』 권20, 성종 3년 7월 임술.

이전에는 없던 형태의 정기 시장이 열리고 물품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농업에서 상업으로 전업하는 자가 늘어나고 물가가 오르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매월 두 번씩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것으로 보아 성립 초기의 장시는 한 달에 두 차례씩 개설되는 15일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농민들의 교환 시장으로서 장시는 분명히 이전에는 없던 유통 기구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장시를 상업이나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성립한 것이 아니라 기근 등의 자연 재해나 군역(軍役)·조세의 부담 때문에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살아가고자 모인 곳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시는 소상품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농민들은 점차 토지의 소유권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자신들의 잉여 생산물을 유리한 조건 아래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장시의 성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농민들은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생산물을 직접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소유 관계가 조성되어 갔다. 장시에서의 교역 물품이 토지 경제에 기반을 둔 생산물 또는 그 가공품이라는 점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시장 개설은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공하였다. 종래의 자급자족 테두리에서 벗어나 물품 거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장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충청도에 이어 경상도 지방에도 설립되고 있었다.2) 『중종실록』 권27, 중종 11년 11월 정미 ; 『명종실록』 권3, 명종 원년 2월 무신 참조 이 시기의 장시는 흉년과 같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민인들 스스로 유무교역(有無交易)하기 위해서, 또는 지방 수령들이 진휼책의 일환으로 개설하였다. 1518년(중종 13)에는 방방곡곡에 장이 서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고,3) 『중종실록』 권31, 중종 13년 정월 임자. 2년 후에는 제도(諸道)에 장시가 개설되고 있다고 하여4) 『중종실록』 권38, 중종 15년 3월 기유. 각 군현에 장시 개설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시의 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17세기 중엽에 크게 증가하였다.

장시 개설의 장단점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민인들의 요청과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장시 개설에 반대하는 주장은 대부분 상업 활동에 나선 민인들이 이끗만 추구하여 놀고먹는 자를 늘리는 반면 논밭은 황폐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시가 처음 개설되었을 때도 지적되었듯이 농사에 종사하는 자는 줄어들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증가하는 이유가 상업은 이득이 많고 농사는 이득이 적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유리(流離)된 자들이 장시를 배경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이들이 도적의 무리가 된다는 우려에서 더욱 금압되었다. 몰락 농민이나 피역자들은 부득이 도적질을 일삼고 장시를 출입하며 훔친 물건을 팔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5) 『중종실록』 권88, 중종 33년 9월 경자. 이 때문에 도적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장시 개설의 확산을 억제하자는 주장이 빈번히 제기되었다. 결국 장시 개설의 억제와 함께 여러 폐단의 지적은 무엇보다도 농사에 힘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는 달리 장시 개설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장시가 흉년을 극복하고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 한 방편이 되고 있으며, 유무교역을 통해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한 경우들이다.6) 『명종실록』 권6, 명종 2년 9월 을해. 장시는 흉년과 같은 어려운 때를 계기로 민인들이 스스로 개설하고 있으며, 장시의 유용성을 인정 하고 있던 수령들에 의해 진휼책의 하나로도 개설되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현실적으로 구황책(救荒策)의 일환으로 허용되었지만 결국은 장시 금압책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장시는 일부 지적된 폐단에도 불구하고 민인들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음을 인정받았다. 장시를 일체 금압하면 민인들이 실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일체 금지시키면 가난한 자들의 생계가 걱정된다고 하는 것 등은 모두 장시의 사회 경제적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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