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2. 장시 개설의 확산과 시장권 형성
  • 지방 관아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던 장세
김대길

조선 정부는 17세기 중반 이래 상업계의 변동과 함께 장시 개설의 증가로 종래의 상업 정책을 보완하였다. 장시 개설은 인정하되 장시에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일정한 장세(場稅)를 징수하는 것으로 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장세는 지방 관아 재정 수입의 일부로 보충되는 잡세(雜稅)의 일종이다. 잡세는 민고세(民庫稅)를 중심으로 한 각종 지방세와 중앙 정부로부터 용인된 일부 교부세를 일컫는데, 지방마다 종류나 징수 방법이 다르고 수세 내역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세 징수의 본래 목적은 지방 관아 재정을 보충하는 등 공용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령이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장세 징수 절차와 방법에서 폐단이 많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세가 비록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상인이나 장시를 드나드는 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또한 본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아전(衙前)이나 군관(軍官)이 자행하는 중간 수탈의 폐 단도 만만치 않았다.11) 김대길, 「조선 후기 지방 장세에 대한 기초 연구」, 『관동사학』 4, 관동대학교사학회, 1989.

많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지방 수령들은 장세 징수를 혁파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대체로 장세가 상인들에게는 별 부담이 없지만 진휼 비용을 보충하거나 왕릉의 개보수나 사절의 접대비용 등으로 써서 민역(民役)을 대신하는 등 공용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재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장세를 혁파하면 어려움을 겪는 곳이 많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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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의 징수와 혁파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방 관아의 중요 재원이 되자 중앙 관아조차 장세 징수로 궁핍한 재정의 보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장세 징수가 여러 가지 폐단이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아의 재정 형편을 이유로 쉽게 폐지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 지방마다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장세는 징수 기구나 담당자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장세 징수는 대개 지방 관아 육방(六房) 중에서 공방(工房)이나 고마청(雇馬廳), 장청(將廳) 등에서 관장하였다. 그리고 장세 징수를 실제 수행한 담당자는 지방 관아에서 임명한 도장(都將)·시장감고(市場監考)·시장감세(市場監稅) 등이었다.

장세는 18세기 중엽 이후에 대부분 화폐로 징수되었지만 이전에는 현물로 징수되었다. 따라서 아전들의 자의적인 징수는 또 다른 폐단을 발생시켰다. 현물의 경우 출하되는 물품에 따라 사기그릇으로 반 그릇 또는 손으로 서너 움큼 징수하는 등 정해진 규례가 일정치 않았다.

장세액은 각 지방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였다. 장세는 매시(每市)마다 일률적인 곳이 있는가 하면 계절별·분기별, 또는 농한기와 농번기를 구분하여 차이를 두는 곳도 있었다.

장세의 용도는 조선 후기 지방 관청의 세출 비목과 비교하면 거의 대부분의 항목에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였다. 즉 장세는 지방관의 봉록, 군병의 삭료 및 경·영주인(京營主人)의 역가(役價)와 기타 인건비, 관아 수축비, 종이·붓·먹 등의 사무용품과 쌀·소금·간장·기름·꿀·꿩·닭·땔나무·한약재 등 지방 관청 운영에 사용되는 물건의 조달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향교의 봄가을 제향, 산천제, 기타 지방 관청에서 거행하는 각종의 제사비, 신·구 수령의 영송(迎送)과 공무 수행자를 위한 고마가(雇馬價) 등의 운수 교통비, 관선(官船) 건조 수리비, 군기(軍器)나 병선(兵船)의 수리, 내의원(內醫院) 약재가를 비롯한 의료비 및 교육비, 진상물의 조달 상납비, 부의금(賻儀金) 등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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