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2. 장시 개설의 확산과 시장권 형성
  • 장시의 증가와 시장권 형성
김대길

장시의 수적인 증가 및 장시 내부의 질적인 발달은 대부분의 장시가 5일 간격으로 열리게 하였고, 점차 지역마다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시장권이 란 일정한 지역 내에서 네다섯 개의 장시가 장날을 달리하며 개시함으로써 그 지역 내에서 상품 거래가 항상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향촌 사회의 물화 유통을 매개해 주는 장시는 대개 5일에 한 번씩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며 인접한 장시와 서로 날짜를 달리하여 개설되므로 일정한 유통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장권은 장시의 신설, 장소 이전, 폐지, 설장일 변경 등 장시의 질적인 발달과 상인들의 상권(商圈) 확대 등에 의해 더욱 넓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개성·평양 등 시전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 이외에는 정기 시장인 장시만이 개설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주나 청주·공주·황주·원산 등 상업 도시로 크게 성장한 곳에도 시전이 설치되어 항시적으로 시장이 열리는 곳이 늘어났다. 정기 시장인 장시 중에서도 상설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곳이 점차 증가해 갔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서는 인접한 네다섯 개의 장시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장이 서는 날이 서로 중복되지 않도록 설장일을 변경하거나 조정하고 있는 사례가 나타난다. 즉 한 지역의 읍내장(邑內場)이 2·7일에 개시하면 타원형을 이루면서 이로부터 30∼40리 거리에 위치한 다른 장시들은 읍내장과는 다른 날에 개시하여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시장권 내 각 장시의 장날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각 군현의 읍내장이 먼저 2·7일에 정하고 그 이외 인접한 장시들이 나머지의 날짜를 택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즉 음양오행설에 따라 오일장의 개시 일자를 음양수(陰陽數)에 의하여 다섯 가지로 나누고, 그 중에서 2·7일자가 음수와 양수의 합이 가장 큰 수인 9자(泰元, 임방(壬方)을 뜻한다고 함)가 되기 때문에 그런 숫자를 부여하였다고도 한다.12) 이재하·홍순완, 『한국의 시장』, 민음사, 1992, pp.87∼88 참조.

지역 주민이나 상인 모두에게 인접한 지역의 개시일은 서로 달라야 편리하였다. 그런데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인접한 장시와의 개시 간격이 멀수록 다른 장시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반면에 상인들은 그것이 짧을수록 장 시의 개시일을 따라 순력(巡歷)하기에 좋았다. 따라서 일정한 시장권 내의 장시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점을 고려하여 개시일을 상호 조정·보완하며 개설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적 시장권은 또 다른 인접 시장권과 연계하여 상품 유통을 더욱 활발하게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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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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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권은 장시 수의 증가와 함께 인접한 장시 사이에 중복된 개시일을 상호 조정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가능하였다. 장시가 수적인 면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던 17세기까지는 인접한 장시 사이에 개시일 중복으로 인한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산골짜기의 외진 마을까지 장시가 개설되는13) 『비변사등록』 53책, 숙종 29년 3월 17일. 18세기 이후로는 설장일 변동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읍치(邑治)나 물화 교역이 활발한 곳에 개설되는 장시를 중심으로 시장권이 형성될 때 이들 장시와 개시일을 같이하는 작은 장시는 개시일을 변경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큰 장시에 흡수·통합되거나 소멸되었다. 그리고 시장권 형성을 위해 신설되는 장시는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장시나 읍치 또는 물화 교역이 왕성한 장시와는 설장일을 피하여 개설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시가 농촌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장시 간의 연계가 긴밀해지면서 18세기 이후에는 특산물 생산지를 중심으로 국지적인 시장권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가운데 충청도에서는 모시 생산으로 유명한 부여·한산·비인·임천·홍산·남포·서천·공주 등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장권이 형성되고 있다. 이들 지역의 장시는 개별적으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개시일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거리상으로도 서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모시라는 특산물이 생산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순회하는 상인이나 지역 주민들로서는 시장권 형성으로 날마다 장시가 열리는 것과 같은 형태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포는 전국에서도 가장 이름난 것이었다. 그리고 해로와 수로가 연결되는 교통상의 이점이 있어 선박을 이용한 상품 교역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는 곳이었다. 한산의 세모시는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의 생리조(生利條)에도 이름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각 지방 장시들 사이에 연계 관계가 긴밀해지고 시장권이 형성되는 배경에는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사상인들은 각 지방의 장시 발달과 더불어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화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 양상은 이 시기에 편찬되는 읍지(邑誌)나 지리지(地理誌) 등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17세기 말 이래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전국적 시장 형성의 요청이 일어나면서 상업 지리, 교통 지리에 대한 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택리지』·『동국지도(東國地圖)』·『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같은 민간의 저술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14) 이우성, 「이조 후기의 지리서·지도」, 『한국의 역사상(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1982, p.125.

상인들은 대개 30∼50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5일마다 개시하는 장시들을 순회하거나 서울의 시전과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며 상품을 유통시켰다. 상인들의 활발한 상품 유통 활동에 힘입어 각 지역의 장시는 군현의 읍치나 물화 집산지·포구 등지에서 개설되는 규모가 큰 장시를 중심으로 시장권을 형성하였다.

시장권은 곧 그 지역의 유통권이었다. 각 지방의 장시 발달과 그에 따른 시장권의 확대는 지역 간 상품 유통의 증대를 가져왔다. 더욱이 18세기 이후 각 지방의 포구(浦口)가 개발되면서 선박을 이용한 상품 수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포구가 새로운 유통 중심지로 대두하였고, 더 나아가 시장권 내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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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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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를 중심으로 한 상업이 발달하고 있음은 선박을 이용하여 생업을 삼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국내의 상품 유통권이 크게 경상도의 동해안과 강원도의 영동 지방 및 함경도를 연결하는 유통권과 전라·경상도에서 서울·개성을 거쳐 황해·평안도로 이어지는 유통권으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 사이에 유통권이 형성되고 있음은 읍지와 같은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함경도 함산(咸山)의 연포장(連浦場)은 영남 지방과 물화 유통이 이루어져 영남의 각종 물화가 많이 교역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각 지역의 장시와 포구가 발달하면서 시장권 내는 물론 지역 간 물화 유통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대량의 상품을 신속하게 먼 거리까지 운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선박과 해로의 이용이 더욱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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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의 화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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