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2. 장시 개설의 확산과 시장권 형성
  • 정기 시장의 상설화 경향
김대길

보름 또는 열흘 간격으로 열리던 시골장이 17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시장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고 읍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나 주민이 많지 않은 곳까지도 시장이 설립되었다. 1607년(선조 40)에는 한 달 30일 동안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각 지역마다 장이 열리고 있었다.15) 『선조실록』 권212, 선조 40년 6월 을묘. 개시일은 점차 각 지역 주민들의 생활 주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시장 개설을 주도하는 상인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상권 확보를 위한 경쟁이 발생하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장시와 장시가 통합되거나 아예 폐지되기도 하였고, 계속적으로 남아 있기 위해 개시일을 변경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도 하였다. 인근에 있는 시장을 고려하지 않고 신설되던 장시들이 한 차례 정비되는 단계를 거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장시는 교통의 요충지, 많은 물화의 유통, 다수의 소비 인구 등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발달하였다. 이 밖에 상인이나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 지방 나름의 특산물이 있을 때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어떤 장시는 지역적인 장점을 이용하여 규모가 큰 장시로 성장하는가 하면, 운송 수단과 도로 사정의 변화로 소규모 장시로 전락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1809년(순조 9)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전국의 대표적인 장시로 15곳을 꼽고 있다. 이들 장시는 대개 읍치를 중심으로 개설되던 곳이 대부분이었고, 조선 최대의 소비 시장인 한양 인근의 장시, 그리고 수로와 해로가 연결되는 곳의 장시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장시가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는 곳도 있었지만 어떤 곳은 19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인근 지역의 장시에 상권을 빼앗기고 보통 시장으로 전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한편 17세기 이후 장시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상업계의 변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상설 점포라고 할 수 있는 포자(鋪子)가 설치된 점이다. 포자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규모와 취급 상품 등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그런데 포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내용과 운영 방침에 대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언급한 것이 남아 있어 대략적인 윤곽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사(鋪舍)를 지음에는 기와로 덮개를 하고 대청·부엌·그릇은 힘써 깨끗하게 하고 푸른 깃대와 음식상도 한결같이 그 제도에 의하고 그 꾸어 주는 미곡은 대동(大同)의 남은 쌀로 하든가 혹은 상평(常平)의 저축한 곡식으로 하되 사의(事宜)를 헤아려서 많게 하기도 하고 적게 하기도 한다. 점포 내에서 관가와 팔고 사는 것은 모두 시가(時價)를 따르고 양반이나 아전의 무리들이 폐해를 끼쳐서 토색(討索)하는 것이 일문(一文) 이상이면 관에 고발함을 허락하여 엄중하게 다스리고 명백히 일의 조목을 세워 판자에 새겨서 문의 웃중방에 걸게 한다.16) 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磻溪隨錄)』 권4, 전제후록 하(田制後錄下) 전폐(錢幣).

조선 중기까지 상설점이라고 하면 서울이나 개성, 평양 등지에 개설되는 정도였다. 지방에 상설점인 포자가 설치되는 것은 17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포자가 설치되는 곳은 물화 집산지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각 지방의 상업 중심지에 상설점인 포자가 광범하게 발전하고 있어 이들 지역이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포자의 설치는 곧 장시의 상설화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포자의 설치는 동전 유통을 확대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제기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655년(효종 6) 영돈령부사 김육(金堉, 1580∼1658)은 경기도와 평안도,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포자를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동전 유통을 활성화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17) 『효종실록』 권15, 효종 6년 12월 계해. 김육의 건의에 따라 평안·황해도 지방에는 많은 포자가 설치되고 있음이 확인된다.18) 『비변사등록』 24책, 현종 5년 6월 14일.

확대보기
김육 초상
김육 초상
팝업창 닫기

그런데 포자의 설치가 확대되는 가운데 식리(殖利) 활동으로 인한 폐단이 지적되어 많은 지역의 포자가 혁파되었다. 포자는 관영(官營)과 민간인이 개인적으로 경영하는 것으로 나뉘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포자는 당연히 상업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관영 포자는 물화 교역을 통한 동전 유통뿐만 아니라 식리 활동으로 지방 관아에서 필요한 재정의 일부를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지만 정책적 목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운영 과 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러한 포자의 설치와 운영은 각 지방의 시장권 형성과 장시의 상설화를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확대보기
상설점
상설점
팝업창 닫기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정기 장시 가운데 일부에서는 상설 시장화되는 모습을 띠는 곳도 나타났다. 정기 장시의 상설 시장화는 대체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먼저 5일에 한 번씩 열리던 정기 장시가 인구가 증가하고 물화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곳에서는 차츰 매일 열리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장터에 상설 점포가 설치되고 상인들이 점차 정착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새로운 장시가 개설되고 장시 상호 간에 밀접한 연계 관계를 맺으며 시장권을 형성하여 그 시장권 내에서는 장시가 매일 열리고 있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18세기 이후 지방 장시가 발달하는 방향은 정기 장시가 아직 개설되지 않은 곳에서는 장시가 신설되는 추세에 있었다. 이미 정기 시장이 개설되고 지방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물화 유통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곳은 점차 상설 시장화의 형태로 발전해 갔다. 정기 시장만이 개설되던 곳에 상설 시장이 형성되면 자연히 그곳을 중심으로 상업 도시가 발달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이와 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지방의 장시에 상설 점포가 설치되어 개시일이 아닌 날에도 늘 장이 열려야 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방 장시는 개별적·분산적으로 개설되는 것에서 벗어나 장시와 장시 사이의 통합과 흡수, 개시일 변경, 장소 이전 등으로 수적인 증가보다는 질적인 탈바꿈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마다 물화 유통이 활발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는 상호 연계적인 시장권을 형성하면서 상설 시장화 형태가 나타났다. 즉 한 지역 단위에 분산되어 기능하던 네다섯 개의 정기 장시들이 서로 긴밀한 연계를 맺으면서 좀 더 큰 지역 단위로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였다. 이 시장권은 또 다른 지역의 시장권과 연결되어 넓은 지역을 두고 본다면 장시가 상설화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