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시전 상인들에게 미움을 샀던 송파장
김대길

송파장(松坡場)은 『만기요람』에서 전국의 15대 장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고, 그 위치상 규모와 교역량이 적지 않았다. 송파장이 개설된 시기는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광주 수어사(廣州守禦使)일 때 창설된 것으로 보아 17세기 말엽 또는 18세기 초인 듯하며, 처음에 개설된 곳은 남한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18세기 중엽에 송파로 옮겨 갔다.

송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진보(鎭堡)와 창사(倉舍)를 설치하고 아병(牙兵)을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이곳에 장시를 개설하여 민인을 불러 모으고자 하였다. 그런데 송파장은 지리적인 위치로 볼 때 서울의 시전과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예민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시전 상인들로부터 폐지시키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경기도 도내에 있는 다른 장시들과는 달리 매월 6회씩 열리는 오일장이었으나 점차 상설 시장으로 바뀌어 시전의 이익을 중간에서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파장의 존폐 문제는 조정에서 논의될 정도로 서울 시전인에게 끼치 는 영향이 대단하였다. 송파장의 혁파에 대해서는 시전 상인들이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향민(鄕民)의 보호와 함께 송파장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았다.

광주 유수 서명빈(徐命彬, 1692∼1763)은 군사적 요충지의 장시는 결코 혁파할 수 없다며 환설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1702∼?)는 서울 시전인은 전사(廛肆)를 열고 향민은 장시를 개설하여 각자 생업으로 삼게 하는 것이 온당하므로 시전인을 위해 서울과 가까운 곳의 장시를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므로 예전처럼 그대로 둘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서울과 지방을 물론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를 모두 보호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경기도는 다른 도보다 특히 장시 개설을 억압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서울에 각종 상품이 모여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전에 특별히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경기 지역의 장시 개설에 대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서울 근교에는 송파장 이외에 사평(沙坪), 광진(廣津), 검암(黔巖) 등의 장시가 있었다. 이들 장시는 한 달에 여섯 차례 교역하면서 경시전에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전인들의 반발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송파장은 이들 오일장과는 달리 거의 매일 개시하고 있어 상설 시장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송파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던 상인들은 서울 근교의 중도아배(中都兒輩)나 난전 상인들과 결탁하여 삼남과 북도·영동의 상인들을 모두 이곳에 모이도록 유인하였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매월 6회 열리는 오일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각 시전의 물종을 쌓아 놓고 날마다 매매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마다 시전 상인들의 이익이 줄어들어 송파장을 혁파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1758년(영조 34)에는 송파장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지, 그대로 존속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장시가 산성 근처에서 송파로 옮겨 온 후 잡류배(雜類輩)로 인하여 경시민(京市民)이 입는 피해가 늘어나자 송파장 의 혁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산성과 송파 사이에 개설되는 장시가 없으면 광주의 백성들이 불편하므로 송파장을 혁파하는 대신에 산성 근처의 옛터에 장시를 개설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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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보 초상
이철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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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광주 유수 이철보(李喆輔, 1691∼1775)는 송파장의 폐지나 이설을 반대하였다. 송파에 장시를 개설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도가 있는데, 시전인이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로 지방의 장시를 갑자기 혁파함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설하는 위치도 송파에서 겨우 10리 정도 떨어져 있어 송파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이로움이 없고 근근이 모아들인 백성들도 장차 흩어질 지경에 이를 것이므로 혁파든 이설이든 결코 이롭지 못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현지 수령으로서 장시 개설이 일반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데 매우 긴요하며,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좌의정 김상로도 장시의 개설과 함께 진보와 창고 등을 설치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전국 각지의 우척(牛隻)이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송파로만 통하는 것이 아니고, 송파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역 내용이 경시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예전처럼 존속시키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경시전이나 장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송파장에는 인근의 상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의 노복이나 무뢰배까지 모여들어 영남, 호남, 강원도 등에서 올라오는 상인들의 각종 상품을 중간에서 매점하여 경시전에 내다 팔아 시전 상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시전인들은 송파장의 혁파를 통해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하였다. 송파장은 경시전인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한때 폐지되거나 이전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치로 볼 때 경시전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여러 대신의 의견과 광주 유수 이철보의 강력한 옹호에 힘입고, 영조가 이를 인정하자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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