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삼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요지에서 성장한 안성장
김대길

안성(安城)은 언제부터인가 안성맞춤이라고 불러야 어울리는 지명이 되었다. 그렇게 불러 달라고 전국적으로 홍보를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렇게 불러 주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을까? 지금은 지방 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각 지역의 특징을 홍보하기에 너도나도 앞 다투어 경쟁하고 있다. 여기에는 시장이나 군수, 또는 그 지역 출신 유명 연예인이 홍보 대사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지역 특산물이나 명물을 지역과 연결하여 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전혀 모르던 지역을 자연스럽게 한번 찾아가 보게 되고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다.

안성이라는 지역이 행정 구역 단위의 하나로 불리다가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안성장은 전국에서 이름난 3대 시장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고, 이 지역에서 생산된 유기(鍮器)가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조선 중기 이래 크게 발달한 지방 장시 가운데 안성 장시는 서울의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달한 송파장이나 누원점(樓院店), 그리고 신도시의 건설로 인하여 번창하게 된 수원의 장시 등과는 성격이 다르다. 안성장은 지리적으로 삼남의 각종 물화와 조세 등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송파나 누원점 등과는 달리 서울의 시전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전 상인들의 견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안성 장시가 번성할 수 있었던 지리적인 이점에 대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안성이 경기와 호서를 연결하고 삼남을 통괄하는 입구가 된다.”고19) 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권14, 별집(別集), 열하일기(熱河日記) 옥갑야화(玉匣夜話). 표현하였다. 이중환은 “안성이 경기와 삼남 지방의 사이에 위치하여 물화의 유통이 왕성하고 상인의 왕래가 빈번하여 한강 이남의 큰 도회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20)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八道總論) 경기도(京畿道). 당시 안성은 동래-대구-충주-용인-판교-서울로 이어지는 영남로(嶺南路)와 영암-나주-정읍-공주-수원-서울로 연결되는 호남로(湖南路)를 이어 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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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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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장이 경기도 도내에서 다른 지역보다 크게 발달하고 있었음은 도내의 다른 장시들과 비교하여 장세를 월등히 많이 징수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는 금압책에도 불구하고 장시가 개설되는 곳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자, 장시 개설은 인정하되 장시에 출입하는 상인들로부터 일종의 매매세를 징수하여 각 지방 관아의 재정에 보충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각 지방의 재정 형편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장세를 비롯한 각종 잡세를 징수하여 충당하고 있었다. 18세기 초의 기록에 의하면 안성에는 황주, 전주, 은진 등 규모가 큰 장시에서와 같이 ‘장세 징수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역실총(賦役實摠)』에 의하면 안성의 장세는 경기도의 32개 군현 가운데 가장 많은 720냥이 징수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안성장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큰 장시로 번성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도 장시 문제를 논의할 때 안성장은 전주, 황주, 은진 등과 함께 지방 장시의 본보기로 거론하는 예가 많았다. 18세기 중반 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시전보다 크다고 할 정도로 규모나 교역되는 물화의 양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보다 크다는 표현에는 과장된 부분이 섞여 있지만 당시 안성장은 물화 교역량이나 드나드는 상인 및 일반인의 수가 서울 못지않았다.

안성 장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이곳에서 유기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많이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제품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품질 면에서 뛰어났다. 안성 지방에 언제부터 유기가 생산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안성에 유기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19세기 초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다. 이에 의하면 안성읍장의 거래 품목으로 유기가 나와 있다. 이로 본다면 적어도 19세기 초엽에는 안성장에 유기가 상품으로 교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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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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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성에 유기 공업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좀 더 확실한 자료가 있다. 안성읍에는 1841년(헌종 7)에 건립된 군수정후만교영세불망비(郡守鄭侯晩敎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공덕비는 10개의 수공업장에서 비용을 갹출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안성에는 놋그릇을 만드는 수공업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여러 수공업장 가운데 가장 먼저 꼽히고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다.

도광(道光) 21년 신축 12월 유점(鍮店) 주점(鑄店) 시점(匙店) 입점(笠店) 연죽점(煙竹店) 야점(冶店) 목수점(木手店) 피점(皮店) 혜점(鞋店) 마록점(馬鹿店) 세우다.21) 김태영(金台榮), 『안성기략(安城記略)』, 1925, p.167.

여기서 유점은 놋그릇을 만드는 수공업장이고, 주점은 쇠를 녹여 쇠붙이 제품을 생산하는 작업장이었다. 그리고 시점은 놋숟가락·놋젓가락 등을, 입점은 갓이나 망건을, 연죽점은 놋담배통과 놋물뿌리를, 야점은 야장간이고, 목수점은 각종 목제품을, 피점은 가죽을, 혜점은 가죽신을, 마록점은 짐승들의 가죽을 가지고 제품을 만드는 수공업장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도 안성에서는 19세기에 들어 유기를 비롯하여 각종 수공업품이 상품으로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성은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수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유기 이외에 한지와 가죽신도 유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안성 유지(油紙)는 시집가는 새 아씨의 빗집(梳入)감에 마침이다.”라는 속요와 “안성 꽃신 반저름은 시집가는 새아씨 발에 마침이라.”라는 속요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연죽(煙竹)의 제작이나 갓 수선 기술도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매우 뛰어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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