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포구의 장점을 이용해 대장시로 성장한 강경장
김대길

강경장(江景場)은 금강 유역의 곡창 지대를 배후지로 하고 있으면서 19세기에 큰 장시로 성장한 곳이다. 특히 수로와 해로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상품 교역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강경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는 포구로서의 역할이 크지 않았고, 인근의 시진포(市津浦)가 은진현(恩津縣)의 관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상업 중심지로 떠올랐다.22) 최완기, 「조선 후기 강경 포구에서의 선상 활동」, 『역사교육』 79, 2001

금강 유역의 원격지 교역은 은진의 강경포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다시 공주·전주 등지로 상품의 집산이 이루어졌다. 즉 강경포는 금강 유역 유통권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원격지 교역의 창구가 되었다. 강경포 상류의 공주 위쪽으로는 물이 얕아 배가 다니기 어려웠고, 강경포에서 공주까지는 작은 배만 드나들 수 있었다. 해선(海船)들이 여유 있게 오갈 수 있었던 입지 조건이 인근 지역 유통권의 중심지는 물론 원격지 교역의 요지가 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철도 같은 근대적 교통 기관이 발달하기 이전에 많은 양의 물품을 좀 더 빨리 운반하는 데에는 말, 소, 수레를 이용하는 육상 교통보다 선박이 훨씬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해로와 수로는 육로보다 대량의 화물을 더욱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원격지 교역은 대부분 해로와 수로를 이용하였으며, 육로는 이들을 통하여 교역된 상품을 지역적 유통권 내부에서 분배하는 기능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3) 이영호, 「19세기 은진 강경포의 상품 유통 구조」, 『한국사론』 15, 서울대국사학과, 1986, p.205.

포구가 상업 중심지 기능을 하면서 인근 포구 간에는 상권(商權)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다. 금강 하구에서 강경포에 이르는 사이의 각 읍에는 소규모의 포구가 적지 않았다. 이들 포구 중에서 어느 정도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강경포와 대립하고 있던 곳으로는 임피(臨陂)의 서지포(西支 浦)·나리포(羅里浦), 함열(咸悅)의 웅포(熊浦)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유통 독점을 두고 강경포와 경쟁하던 곳은 금강 하구와 강경포의 중간쯤에 있는 웅포였다. 19세기 중엽 웅포는 이미 강경포의 북어수세(北魚收稅)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여 용동궁의 북어수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강경포 상류에 위치한 포구는 대부분 작은 선박만 운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강경포의 유통권 내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경포와 이웃한 상류의 논산포(論山浦)는 상황이 달랐다. 논산포는 포구의 소속처 또는 장대(場垈)의 소속처를 두고 은진과 노성(魯城)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다. 논산에 근거지를 둔 상인들로서는 강경포에 상인들이 몰려가는 것에 대해 항상 불만이었다. 이들은 때로 강경포로 왕래하는 선박들을 유인하여 논산포에 강제로 정박시키기도 하였다.

홍수로 인해 논산 포구의 수심이 깊어지면서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강경포와 논산포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이를 둘러싸고 영읍(營邑)에 글을 올려 호소하며 해결책을 요구하기도 하였다.24)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 5월 8일. 결국 두 곳의 포구가 은진현에 소속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지만 이 시기에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강경장은 18세기 중엽 이후 신흥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17세기 후반 포자가 설치되면서 상업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강경장은 금강을 통해 각 지역의 상품이 선박을 통해 집산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은진 강경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은진의 강경 한 마을만은 충청도 전라도의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안의 평야 가운데에서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룬다. 어민 및 산간 농민들이 모두 이곳에서 물건을 내어 바꾸어 간다. 매년 봄·여름 동안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을 때면 비린내가 마을에 가득하고, 큰 배와 작은 배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항구에 담 같이 가득히 늘어선다. 한 달에 여섯 번씩 크게 장이 서는데, 먼 곳 가까운 곳의 화물이 이곳에 모였다가 실려 나간다.25)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忠淸道).

강경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799년(정조 23) 강경 일대를 돌아본 암행어사가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은진은 호서에서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민호(民戶)가 1,400∼1,500호가량 된다고 하였다. 은진의 강경포는 삼남에서도 으뜸이 되는 도회지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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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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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경장에서 거래되던 주요 상품 가운데 하나가 주로 함경도에서 생산되던 북어(北魚)였다. 상인들은 동북 해안에서 잡히는 북어를 주로 육로를 통해 한양과 인근 지역으로 운송하여 판매하였다. 그러던 것이 전국적으로 시장권이 확대되는 19세기 이후에는 동해안과 창원의 마산포(馬山浦) 등지를 거쳐 은진의 강경포까지 해상 운송하였다. 상품 교역의 중심지가 된 강경장에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상품의 중개 매매 또는 위탁 판매나 매점 활동을 벌이고 있던 물화 주인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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