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북어 생산지로 유명하였던 원산장
김대길

함경도 덕원부(德源府)에 속해 있던 원산장(元山場)도 『만기요람』에 기록된 전국 15대 장시 중 하나였다. 원산은 어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평범한 작은 어촌이었다. 그러던 곳이 점차 지역 간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고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교통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상업 거점으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이곳에서 개설되던 원산장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상업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영조대에는 원산에 크고 작은 각종 형태의 선박이 집결되어 마치 서울의 한강에서도 상품 유통이 가장 활발하던 한강·서강·용산강 같은 풍경이었다고 하였다. 원산장이 규모는 작으나 수도 한양의 상업 분위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정조대에는 원산에 사방의 물자가 모여들고 시전과 점포가 화려하게 늘어서고 상인이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인구도 크게 늘었다고 하였다. 원산이 신흥 상업 도시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명태 건조 모습
명태 건조 모습
팝업창 닫기

원산이 상업 유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까닭은 관북 지방과 영남의 상품이 교역되는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산물의 유통 범위 확대와 수요 증가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특히 명태는 일반 부식물로서 뿐만 아니라 제사용으로도 수요가 많았다.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 箋散稿)』에 “북쪽 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을부터 북어가 많이 이르는데 한 번 잡으면 배에 차서 산처럼 쌓인다.”고 한 것이나 “북어가 온 나라에 차 넘친다.”는26)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1, 북어변증설(北魚辨證說) 및 온어변증설(鰮魚辨證說). 표현은 당시 북어가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확대보기
설중향시(雪中向市)
설중향시(雪中向市)
팝업창 닫기

원산에서 나는 북어는 사상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육로를 통해 강원·황해·평안도를 비롯하여 서울로 공급되었다. 그리고 해로를 통해 멀리 경상도와 충청도 강경장까지 운반하여 전국에 공급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당시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은 북어를 주로 말에 실어 서울까지 운반하여 판매하였다.

상인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이익을 많이 남기고 못 남기는 것은 상품 운송의 대량화와 신속성에 달려 있게 마련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원산에서 말에 미역과 건어를 싣고 사흘에 돌아오면 조금 이익이 생기고, 닷새 동안 걸리면 무해무득(無害無得)하고, 열흘이나 유숙하게 되면 큰 빚을 지고 돌아오게 된다.”고 하였다.27)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篇) 거(車). 이와 같은 상황은 새로운 교통로의 개설이나 지름길이 개척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이다. 함경도의 안변·덕원·문천 지역의 민인들은 말을 고용하여 원산에서 어물을 대량으로 싣고 한양이나 인근의 안성 등지에 판 다음 쌀을 사서 가기도 하였다.28) 『비변사등록』 110책, 영조 18년 정월 7일. 그리고 포상(布商)들은 베를 수백 포씩 말에 싣고 한양에 들어와 판매하기 때문에 포전(布廛)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고29) 『승정원일기』 1280책, 영조 44년 5월 12일. 호소하기도 하였다.

함경도의 상인들이 한양이나 인근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간 것처럼 시전 상인이나 경강 상인들도 함경도를 오가면서 활발하게 상품 교역에 참여하였다. 원산장은 지리적인 장점과 지역 생산물의 특수성에 힘입어 동해안 지역에서 대장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