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내륙 산간 지역에서 크게 성장하였던 목계장
김대길

조선시대에는 충청북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대장시라고 할 만큼 크게 성장한 장은 없었다. 다만 충주의 읍내장이 행정 군사 기능의 중심으로서 나름대로 상품 유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상품 운송의 편리성과 신속성 등을 검토할 때 해로와 수로를 빼놓을 수 없다. 충청북도의 특징 중 하나는 바다와 접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한강이라는 수로가 수도인 한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남한강 줄기 여러 곳에는 크고 작은 장시가 개설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충주의 목계(牧溪)는 공물(貢物)이나 세곡(稅穀)이 집중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장시가 성장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한강 하류 지역은 수로 사정이 좋아서 언제나 선박이 운항할 수 있지만 상류로 올라갈수록 항행(航行)할 수 있는 기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수량, 수심, 풍향 등의 여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것에 따라 목적지에 다다르는 시간이 달라졌다.

용산을 기점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수는 양근까지 사흘, 이포까지 나흘, 여주까지 닷새, 목계까지 이레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일수는 이보다 빨랐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영춘에서 한양까지 닷새 반, 단양에서는 닷새, 충주에서 나흘, 여주에서 이틀, 이포(梨浦)에서 하루가 소요되었다.34)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춘(永春), 단양(丹陽), 충주(忠州), 여주(驪州) 전세조(田稅條). 그런데 이러한 소요 일수도 비가 내려 수량이 크게 늘어난 시기에 힘 좋고 기술이 좋은 사공을 만나면 더욱 단축되기도 하였다.

목계에 장시가 개설되는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7세기 전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는 각 지역의 읍치나 교통의 요충지 등에도 장시가 개설되고 있는 시기로서, 목계에도 자연스럽게 시장이 개설되었을 것이다. 목계는 조선 초기부터 남한강 조운(漕運)의 요지로 기능하고 있었다.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은 충청도 16개 고을과 경상도 7개 고을의 세곡이 집중되었다가 한양으로 운송되는 집산지였다. 이곳에는 배에서 일하는 수부만도 400∼500명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인근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쌀·베·특산물의 운송과 하역에 필요한 일꾼들이 모여들면서 취락의 규모도 더욱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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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운반선
한강의 운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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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 집산지가 되면서 이 지역에 상주하며 상품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 객주들이 늘어났다. 객주는 취급 상품과 소유하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물상객주(物商客主)와 여각(旅閣)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목계에도 많은 객주가 들어섰다. 목계에는 주로 미곡, 참깨, 어물, 소금, 청과물, 우마, 석유, 담배를 취급하는 객주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충주 관내에 위치한 금천(金遷)에 대해 이중환은 “그 중에서도 금천과 가흥이 가장 번성하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으로 돌아 나가므로 동남쪽으로 영남의 화물을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에서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기 때문에 민가가 즐비하여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이 서로 닿아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룬다.”라고 하였다.35)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가흥이 한창 번성할 때의 모습이 경강 주변의 나루와 흡사하다고 할 정도였다.

한편 남한강 변에는 크고 작은 포구가 50개 이상 있었다. 이들 포구 가운데 충주의 목계나 여주의 이포 등 거상(巨商)들의 관심이 미치는 곳에는 창고가 들어서 인근 지역의 생산물을 집하시키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배가 들어올 때마다 열리는 ‘갯벌장’이라는 부정기 시장이 열려 거래가 이루어졌다. 배가 들어오는 날이 일정하지 않았고 배에 실린 상품이 하루 만에 다 팔려 나가기도 어려웠다. 부정기 장이었기 때문에 겨울철이나 기타 뱃길이 막힐 때는 오랫동안 장이 서지 않기도 하였다.36) 최영준, 「남한강 수운 연구」, 『지리학』 35, 대한지리학회, 1987, pp.66∼67 참조.

이러한 갯벌장은 1910년대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갯벌장이 열릴 때는 들놀음, 윷놀이, 줄타기 등 손님을 모으는 각종 놀이가 행해지고 들병장수들이 활개를 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갯벌장이라고 해서 전혀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장이 되지 않도록 일정한 교역 장소인 도가(都家)를 두어 이곳을 통해 소금이나 해산물이 팔려 나가도록 하였고, 곡식 바리를 감독하는 말감고도 두었다고 한다.37) 신경림, 「남한강의 뱃길 천리」, 『한길 역사 기행』 1, 한길사, 1986, pp.115∼116.

목계는 조선 후기 5대 하항(河港)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로 남한강 변에서는 이름난 곳이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소금배나 기타 다른 배가 들어올 때면 장이 섰고, 장이 서면 며칠 동안 계속되기도 하였다. 한창 전성기 때에는 가구 수가 800호에 달하고, 드나드는 배도 1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구당 네 명씩만 계산해도 3,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회지’인 셈이다. 이중환도 이런 모습을 보고 “목계는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그리고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 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38)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남한강 유역의 생산물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토지가 비옥한 이천·여주·죽산·음죽·충주 일대에서는 농산물과 축산물이 주로 생산되었고, 상류 지역으로 갈수록 밭곡식과 임산물, 담배, 약초 등이 주 생산물이었다. 이러한 산물 중 잉여물은 대부분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되어 판매되었다. 그리고 서해안의 해산물과 조선시대 최대의 소비지인 한양에서 확보한 각종 잡화물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박에 실려 남한강 유역의 각 고을로 공급되었다.

한양과 서해 바다의 산물들이 배에 실려 오면 상인들은 등짐이나 봇짐 으로, 또는 달구지에 실어 충청도는 물론이고 강원도나 경상도의 산간 지방으로 운반하여 교역하였다. 특히 마포에서 올라온 새우젓 등 해산물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중원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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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
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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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길을 통해 충청도와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는 식생활에 필수적인 소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내륙 지방 사람들에게 한강 뱃길이 중요한 것은 바로 소금이 공급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한강의 상류 지역에 공급된 소금은 동해안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택리지』에 “원주는 동해의 어염이 모여든다.”라고 한 것이나 “목계는 동해의 소금을 실은 배가 염세를 내는 곳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남한강 수로 이용이 활발해지면서 서해안의 소금 공급량이 늘어났다. 배에 실려 올라온 소금은 가흥, 목계, 금천, 조둔, 황강, 청풍, 상진 나루 등에 내려져 새재와 죽령을 넘어 영남으로 가기도 하고, 원주를 경유하여 강원도로 가기도 하였다. 특히 영남 지역의 경우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그나마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남한강 수로였다.

돈이 되는 일을 상인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충청도 보은, 청안 일대에는 금강에서 공급된 소금이 팔리고 있었다. 소금 판매를 둘러싸고 상인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럴 경우 속이 편해지는 것은 소금을 사먹는 사람들이다. 상인들 간의 경쟁 덕분에 자연적으로 질 좋은 소금을 상대적으로 싼값에 사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금 가격은 어느 곳에서 거래되는냐에 따라 값이 달라졌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여러 가지 여건상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소금 가격은 변동이 심하였지만 소금 한 말에 콩 두 말 정도로 교환되었다. 그러던 것이 인천의 개항과 함께 청나라의 소금이 수입되어 공급되면서 교환 비율이 달라졌다. 1890년에 이르러 남한강 유역에서 거래된 소금과 콩의 교환 비율은 일대일로 바뀌었다.

목계가 상업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이곳에 근거지를 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업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를 지냈다. 바다가 아닌 강이지만 언제라도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마을의 안녕과 보부상 등 장사꾼들의 재복을 기원하는 제의가 자연스럽게 행해진 것이다. 목계 별신제는 남한강 유역의 교역 중심지가 만들어 낸 최고의 장시 축제였다. 1920년대 조선 총독부가 조사한 것에 의하면 목계 별신제는 시장 관계자들이 시장 번영책으로 3년, 5년, 10년 만에 한 번씩 사흘 내지 이레 동안 벌이던 최대의 향토 축제였다.39) 村山智順, 『部落祭』, 朝鮮總督府, 1937. 별신제를 지내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터이지만 이를 감당할 만큼 남한강 이용자들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목계 나루의 교역 물자는 서울에서 새우젓·조기·소금·미역·고등어·설탕·광목 등이 들어오고, 목계에서는 쌀·보리·팥·조·담배·고추·베·나무 등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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