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4. 약령시와 우시장
  • 약재의 상품화와 약령시 형성
김대길

조선 후기에는 5일마다 정기적으로 개시되는 장시뿐만 아니라 특수 시장도 있었다. 특수 시장이라 함은 일반 시장과는 달리 거래되는 상품이 한정되어 있는 시장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특수 시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약령시(藥令市)였다. 약령시는 각종 약재를 교환, 매매하는 시장을 말한다. 약령시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대구를 비롯하여 원주·전주·공주·진주·청주·충주·개성 등지에서 개설되었다.40) 권병탁, 『약령시 연구』, 한국연구원, 1986.

약령시는 영시(令市)라고도 하는데 장시와 마찬가지로 정기 시장에 속하였지만 성격이 달랐다. 장시는 매월 여섯 차례에 걸쳐 하루 동안 열리는 것이었지만 약령시는 한 해에 두 차례 열렸고, 개시 기간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적어도 열흘 이상이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의료업에 종사하는 자들과 상인들이 모여들어 대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약령시를 특수 시장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약령시의 발생 배경에 대해서는 1658년(효종 9) 관찰사의 명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설,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수집하기 위해 개설하였다는 설, 중 국 또는 일본에 수출하기 위한 무역품으로서의 한약을 수집하기 위해 설치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약령시가 정확하게 언제,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들여오는 약재인 당약(唐藥)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초기 이후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향약(鄕藥) 약재의 채취와 재배가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품질이 좋은 약재는 중앙으로 진상(進上)되기 마련이었고 나머지가 민간의 수요에 충당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향약의 쓰임새가 다양해지고 수요가 많아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진상 과정에서 관리 부실로 약재가 부패하기도 하고, 공납 과정에서 아전과 관리들의 결탁으로 원활한 향약 수급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로 당약의 공급도 크게 줄어들면서 향약의 자급자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광해군대에 실시된 대동법은 수취 제도뿐만 아니라 약재의 공급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동법 실시에 따라 약재 공급도 공인(貢人)들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약령시의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약재는 대부분 건조된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보관이 가능하고 약효와 상품성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의원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약재의 대량 구매를 통해 비교적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그것을 최종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취할 수 있었다. 결국 한약재는 실수요자가 한 해에 두 차례 열리는 약령시에서 구매하면 되었다. 한약재 도매상도 약령시에서 필요한 약재를 대량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봄가을로 열리는 계절적 영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약령시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관의 명령에 의해 개시하게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향약재를 채취하는 기준을 월령(月令)이라 하는데 농가월령(農家月令)에서와 같이 계절을 나타내어 봄과 가을에 개시 되므로 영시라고 일컫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영시는 정기적으로 개설되는 장시와는 다른 시장이었다. 그래서 “장에 간다.”는 것은 장시에 간다는 뜻이고, 지금은 생소하게 들리는 “영에 간다.”는 말은 바로 약령시에 간다는 뜻이었다. 한약재가 반드시 약령시에서만 거래되는 것은 아니었다. 각종 약재가 장시에서 거래되는 중요한 상품으로 부상하면서 농민들은 유통 경제에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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