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5. 장시의 사회·문화적 기능
  • 각종 정보의 홍보와 수집 장소
김대길

조선 후기에 지방 장시가 대부분 오일장으로 통일되면서 장시는 지역 주민들의 경제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지방 수령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장시는 적어도 닷새에 한 번 상인과 일반 민인들이 모여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다.

장시는 일반 민인들이 자연스럽게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고, 장시의 개시일은 바로 시간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곳이었다.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장터는 수령이나 위유사, 암행어사 등이 윤음·정령·전령 등을 알리는 장소로써 뿐만 아니라 민인들의 동태를 관찰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로 장시나 점막(店幕) 등을 둘러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장시는 정부의 각종 시책을 알리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모역자의 처형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민인들이 자연스럽게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장시였고,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날이 개시일이었기에 정부에서도 이와 같은 장시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장시 주변의 점막이나 주막 같은 곳에 는 도고 행위를 금지하라는 경고문을 게시하여 알림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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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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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라는 공간은 일시에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릴 수 있는 장소였다. 이와 같은 장시의 사회적 기능을 일반 민인들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장시는 괘서(掛書)나 벽서(壁書)가 나붙는 곳으로 사회에 불평·불만을 품고 있거나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괘서는 장시나 포구,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목이나 교통의 요지에 부착되는 일종의 ‘대자보(大字報)’로써 민심의 선동과 불만의 고양을 통해 집권층에 간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저항 수단이었다.46) 이상배, 『조선 후기 정치와 괘서』, 국학자료원, 1999.

민인들의 의사 표현의 한 방법으로 이용된 괘서는 17세기 이래 농업 기술 발달 등에 힘입은 생산력 증대와 상업 분야에서 부상대고 같은 사상인의 성장, 지방 장시의 발달 등과 같은 이 시기 사회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괘서 사건은 19세기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어 집권층을 긴장하게 하였다. 중요한 괘서 사건은 1801년(순조 1)의 하동(河東) 괘서, 1819년(순조 19)의 화성(華城) 괘서, 1826년(순조 26)의 청주 괘서, 1854년(철종 5)의 봉화(奉化) 괘서 등이었는데 모두 당시 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출과 봉기를 선동한 것이 공통점이다. 민인들이 자연스럽게 가장 많이 집산(集散)하는 장소인 장시는 19세기 후반 민중 운동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평안도 농민 전쟁 때도 주동자들은 장시를 출입하며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각 지방에 개설된 장시는 여성들이 상품 생산과 판매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여성들의 경우 평소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장날만큼은 자연스럽게 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속담에 “여자는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세상일을 모르고 집안에서 살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속담은 장날을 통한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성에서 전해지는 ‘안성장터가’를 통해서도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통해 상품 거래에 나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 안성 큰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

한 닙 팔고 두 닙 팔어 파는 것이 자미라

경기 안성 큰아기 숫가락 장사를 나간다

은(銀)동걸이 반수저에 깩기 숫갈이 격(格)이라.

안성에서 생산된 특산물이 여성을 통해 판매되고 있는 상황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여성들이 수공업 제품 등의 생산과 판매에 참여하고 있음은 여러 형태의 풍속화와 민화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풍속화에 나타난 모습이 자가 소비를 위한 생산일 수도 있지만 17세기 이래 대동법의 실시, 동전 유통의 활성화, 조세의 금납화, 상업적 농업의 확대 등으로 일반 농민과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유통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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