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5. 장시의 사회·문화적 기능
  • 민초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준 장터
김대길

조선 후기 장시는 유무교역하는 물화 교역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유흥장·놀이마당으로 이용되었다. 시간적으로 장이 서는 개시일과 공간적으로 민인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장터는 이제 물화 교역뿐만 아니라 민인들의 유흥·오락 장소로도 기능하게 되었다. 주로 무뢰배로 지칭되는 자들이나 상인, 또는 민인들에 의해 판이 벌어지는 투전(投箋) 또는 골패(骨牌) 등의 잡기(雜技)는 주로 장시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잡기’라고 표현되는 민중들의 놀이 문화는 18세기 후반 이래 각 지방의 장시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놀이도 도가 지나치면 놀음이 된다. 정조대의 기록을 보면 잡기로 노닐며 무절제하게 도박하다가 농우나 토지를 팔고 부족하면 양민을 유인하여 가산을 탕진케 한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9세기 중엽의 자료로 보이는 『목강(牧綱)』에도 장시에서 발생하는 잡기의 폐단과 이를 신칙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장시는 가장 엄히 단속하고 힘을 쏟아야 할 곳이라며 모리배의 폐단을 지적하는 가운데 도고(都賈)·각리배(榷利輩)가 북을 두드리며 돈을 구걸하거나 투전·잡기하는 폐단을 만들고 있어 감고(監考)와 도장(都將) 등으로 하여금 철저히 단속하도록 하고 있다.47) 『목강(牧綱)』 적간(摘奸)(『조선민정자료총서』, 여강출판사, 1987, pp.176∼177). 일반 민인들에게는 일종의 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배층에게는 폐단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도 사람들은 지금과 마찬가지 로 놀음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장시에서 발생하고 있는 잡기의 폐단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음성(陰城)에서도 잡기의 폐단이 지적되고 있다. 음성 지역의 민인들이 잡기로 인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돈과 곡식을 왕래하는 상인에게 잃거나 밭뙈기마저 인근의 호민(豪民)에게 빼앗겨 부모 형제를 속이고 패가망신하여 처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관가에서 이를 엄중하게 단속하였으나 투전꾼들은 촌사(村舍)와 점막에서 무리를 모아 판을 벌리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에 관아에서는 투전하다가 발각되면 장(杖) 80에 처한다는 내용의 전령을 여러 점막과 큰 거리에 붙여 잡기로 인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48) 『역용(亦用)』 7월 초10일(『한국지방사자료총서』 7, 여강출판사, 1987,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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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가 민인들의 오락장이나 유희장으로 기능하면서 장시의 개시일은 서로 먼 곳에 있는 이들을 만나보는 사교의 날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만남의 자리에 탁주나 소주가 등장하여 장시는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마련되는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조(釀造)와 매주(賣酒)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양조로 인한 곡식 낭비가 큰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 빈번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흉년일 때는 주금(酒禁)이 지속적으로 강조되기도 하였다.

한편 농촌에서 생활 주기가 되었던 장날은 평소 가사와 농사일에 매여 있던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는 요소가 되었다. 19세기 말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본 장날의 모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평상시 잠잠하고 답답하였던 마을들은 장날에 일변한다. 떠들썩해지고 울긋불긋해지고 사람들의 물결로 뒤덮이는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공식적으로 지정된 장터로 가는 길은 농부들이 팔거나 물물 교환할 물건들로 가득 찬다. 예컨대 우리에 넣은 닭·돼지·짚신·밀짚·모자, 그리고 나무숟가락 등을 메고 지고 간다. 그 옆의 주요 도로에는 대개 힘세고 단정하고 잘 입은 상인 즉 보부상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지고 가거나 또는 짐꾼이나 황소에 짐을 싣고 길을 메운다.49)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 p.352.

장에 가기 위해 평소 아껴 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필요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 여유 있는 물품을 손에 들거나 머리에 이고, 혹은 등에 짊어지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과 전문 상인들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하다. 장을 보러 가는 이들의 발길이 활기에 넘치는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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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날은 술사(術士)나 사당패들이 유희(遊戲)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농법과 이앙법의 보급 등을 통해 진전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필요 노동력을 크게 절감함으로써 광작(廣作)이라는 새로운 농업 경영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농촌 사회의 분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져 많은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광산 또는 도시로 몰려들어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은 유리걸식(流離乞食)하거나 도적의 무리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무리를 지어 사당패(寺黨牌) 또는 걸립패(乞粒牌) 등으로 불리는 민중 놀이 집단을 형성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점차 근거지를 떠나 노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전국 각지를 돌며 그 지역의 풍물이나 재주를 흡수하면서 지주나 상인들에게 연희(演戲)를 하고 그에 따른 돈이나 물품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사찰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내세워 각 지방의 장시를 돌며 연희를 통해 곡식을 구걸하거나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이들이 연행(演行)하는 주 무대는 바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날짜를 달리하며 개시되고 있는 장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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