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5. 장시의 사회·문화적 기능
  • 실학자들은 장시를 어떻게 보았을까
김대길

조선 후기 각 지역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자리 잡고 있던 장시에 대해 실학자들은 어떤 입장에 있었을까? 대표적인 실학자들의 장시관을 간단히 살펴보자.

반계 유형원은 민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곳의 장시만 개설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할 것을 주장한 반면, 각 지역의 역참(驛站)을 물화 교역 장소로 적극 활용할 것도 제안하였다. 그리고 물화 집산지와 교통의 요지 등에 전사(廛肆)나 포자 같은 상설 점포를 설치하여 정기 장시를 상설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장세는 상인과 민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징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전이나 무뢰배가 자행하는 폐단을 바로잡아 장시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도 주장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기본적으로 농사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업 활동과 동전 유통의 억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상업 발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입장에 있던 이익도 장시의 완전 폐지까지는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민인이 의지하고 있는 장시를 억제하면 또 다른 폐단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장시 개 설 방법을 보완하는 선에서 장시 개설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이래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장시의 기능이 확대·다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시 개설과 개시일에 대해 통제를 가하고자 하였던 점은 동전 유통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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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星湖僿說)
성호사설(星湖僿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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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聾菴)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지방 상업의 발전을 위해 상설점인 액점(額店)을 설치하여 물화 교역의 중심지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한편 정기 장시가 명화적(明火賊)과 무뢰배의 소굴이 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전면 폐지를 주장하였다. 장시 혁파에 대한 그의 주장은 장시의 근본적인 혁파라기보다는 당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상업계의 사정을 정책에 그대로 반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상업세 수입의 증대로 국가 재정의 일부를 보충하고자 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취석실(醉石室)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은 상업에 대하여 중농주의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농업과 상업의 발전을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적극적인 상업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관아에서 행상에게 사업 자금을 대여해 주도록 하거나 수원부 내 포구인 빈정포(濱汀浦)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것 등에서 알 수 있다. 우하영은 상업적 농업의 적극 권장과 상인의 보호 및 장시의 육성책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그의 장시관은 수원부의 활성화 방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전방(廛房)의 설치와 읍치 근방에 장시를 개설하는 것이 효과적인 모민(募民)의 방법이며, 수원이 도시 화할 수 있는 요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 시기 장시의 성격과 기능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는 입장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가 활동한 당시의 상업계에 나타나고 있는 특권 상업 및 매점 상업을 억제시키고, 중농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물화 유통과 상인의 활동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상업관은 상인의 활동과 동전 유통이 농촌 사회에 백해무익한 것으로 보았던 이익과 상업 제일주의를 주장한 유수원·박제가 사이의 중간적 입장 내지는 농업을 위주로 하고 상업을 부수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업관을 지닌 정약용은 장세 징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장시가 민인들의 교역과 생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수령은 아전이나 무뢰배가 저지르는 폐단을 당연히 제거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는 장시를 설립하여 교역케 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고 민생을 구제하는 일대 명맥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동여도지(東輿圖志)』와 『여도비지(輿圖備志)』에 전국의 장시 개설 상황을 자세히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동지지』를 편찬하면서 장시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풍속·재용(財用)·수리(水利)에 대한 내용을 누락하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그들 각자가 활동한 시기의 장시 개설에 대해 일부 문제점을 제기하는 한편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장시의 개설과 기능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으며, 장시의 폐단을 이유로 장시의 완전 폐지나 이를 더욱 억압하기보다는 전진적인 방향으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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