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1. 상업적 작물의 생산과 상품화
  • 쌀과 곡물이 상품으로 탄생하다
이상배

1792년(정조 17)에 정조가 여러 신하들에게 시(詩)를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서울의 모습을 읊으면서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飯顆山) 같고, 운자(雲子) 같은 흰 밥에 기름이 흐른다”고50)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20, 성시전도(城市全圖). 반과산(飯顆山)이란 밥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 장안(長安)의 반과산에서 유래된 것이며, 운자는 빛깔이 흰 돌로 운자석(雲子石)을 가리킨다. 한 구절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쌀이 상품화되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쌀농사를 짓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논에 먼저 물을 대고 볍씨를 뿌려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수경법(水耕法)이다. 둘째는 물이 없는 논에 볍씨를 뿌려 두었다가 비가 온 후 땅이 질척해지면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건경법(乾耕法)이다. 셋째는 논 한쪽에 물을 대고 볍씨를 뿌려 싹을 틔운 후 일정한 크기로 모가 자랐을 때 뽑아서 작은 포기로 나누어 논에 줄을 맞추어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이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수경법과 건경법에 의해 모내기를 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앙법은 종전의 기술보다 인력이 덜 투입되면서도 오히려 생산량이 늘어나는 장점이 있다.

벼는 심고 거두는 시기에 따라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일찍 심어서 일 찍 거두는 올벼를 조도(早稻)라 하고, 늦게 심어서 늦게 거두는 늦벼를 만도(晩稻)라 하며, 중간 시기에 심어서 거두는 중생벼를 차조도(次早稻)라 한다. 조선시대 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각종 농서(農書)에 따르면 벼의 종류에 따라 각각 여러 품종이 있었다. 조선 전기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저술한 『금양잡록(衿陽雜錄)』에는 올벼가 3종, 중생벼가 4종, 늦벼가 17종이 있다. 18세기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올벼가 5종, 중생벼가 8종, 늦벼가 21종이 있다. 그리고 19세기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편찬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올벼가 19종, 중생벼가 10종, 늦벼가 30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품질 좋은 벼가 생겨났음을 보여 준다. 벼의 품질 개선에 따라 쌀의 생산량도 더욱 늘어났으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조선 후기에 쌀이 상품화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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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작물인 곡물의 재배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농종법(壟種法)과 견종법(畎種法)이 그것이다. 땅을 갈아엎으면 밭이랑과 밭고랑이 생기는데 둔덕인 밭이랑에 씨앗을 뿌려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이 농종법이고, 밭고랑에 씨앗을 뿌리는 방법이 견종법이다. 조선 전기에는 소(牛)의 보급이 적었고 큰 쟁기를 사용하지 못하여 이랑의 높이가 낮고, 고랑의 크기가 넓었다. 그만큼 추위와 바람에 모든 곡물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소와 쟁기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깊은 고랑과 높은 이랑을 만들 수 있었다. 이에 추위에 강하고 습기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팥과 조 등은 밭이 랑에 심고, 추위에 약하고 습기가 필요한 보리 등은 깊은 밭고랑에 심었다. 이로써 냉해나 습도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기가 더욱 나아졌으며,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수확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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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도의 농민 모습
경직도의 농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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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작물을 재배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1년에 두 번 내지는 2년에 세 번 재배하여 수확함으로써 다양한 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 전기에도 행해지고는 있었지만 일반화되지 않았다가, 조선 후기에 널리 확대되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보리를 수확한 후에 콩이나 조를 심는데 그것을 근경(根耕)이라 하며, 근래 농가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고 하여 18세기 이후 널리 확산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부지런한 농민은 한 해 에 마(麻), 연초, 무를 같은 장소에 돌아가면서 심어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작물의 품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거름을 주는 방법도 발전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곡물을 심을 때만 사람과 동물의 분(糞)과 요(尿)를 거름으로 뿌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작물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비료를 주어 활발한 생장을 도왔다. 나아가 거름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분과 요를 다른 풀잎이나 볏짚 등과 섞어서 거름을 만들거나, 풀을 베어 썩혀서 퇴비를 만드는 등 시비법(施肥法)이 더욱 발전되어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오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밭작물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일찍부터 조·보리·콩 등이 일반적인 품종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종류가 더욱 다양화되었다. 세종 때 왕명에 의해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삼(麻)·벼(稻)·기장과 조·피(稷)·콩(大豆)·팥(小豆)·보리(大麥)·밀(小麥)·참깨(胡麻)·메밀(蕎麥) 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성종 때 간행된 『금양잡록』에는 조 17종, 보리 6종, 콩 6종, 수수 4종, 팥 3종, 기장 2종, 피 1종, 밀 1종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곧 각각의 곡물이 계속해서 더 다양한 품종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배 방법이나 기술의 발달, 그리고 품종의 다양화 이외에도 각종 농기구의 발달과 보·저수지 등의 수리 시설 확충도 쌀과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조건의 변화는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늘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장시(場市)나 상인을 통해 거래함으로써 부를 축적함은 물론 국가 전체의 경제가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쌀과 갖가지 곡물은 어느 정도의 양이 상품화되고 있었을까? 이는 『임원경제지』에 나타난 장시 거래 물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쌀과 곡물 중 대표격인 콩·보리의 19세기 초 유통 현황은 표 ‘『임원경제지』 에 나타난 장시의 곡물 거래 현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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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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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052개 장시 가운데 실제 거래 물목이 기록된 곳은 325개이다. 이 가운데 쌀은 260곳에서 거래되어 80%, 콩은 175곳으로 54%, 보리는 157곳으로 48%의 장시에서 유통이 되고 있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쌀의 경우 호서·관동·관북을 제외하고는 95% 이상 거의 모든 장시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는 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쌀의 상품화 현상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아가 쌀을 사서 먹는 소비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있음을 반증한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수도 서울이었으며, 지방 대도시인 평양·개성·대구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비 도시로 성장하여 갔다.

실제로 정조 때 서울에서 요구되는 쌀의 양은 모두 100만 석에 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로 유입되는 쌀은 40만 석에 불과하여 늘 품귀현상이 나타났다. 정조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좌승지 유의양(柳 義養, 1718∼?)은 쌀의 부족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표> 『임원경제지』에 나타난 장시의 곡물 거래 현황
구분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동 해서 관서 관북
장시 92(34) 157(59) 187(55) 269(72) 51(26) 109(23) 145(42) 42(14) 1,052(325)
34 100% 21 36% 55 100% 70 97% 11 42% 23 100% 42 100% 4 29% 260 80%
6 17% 14 24% 24 44% 65 90% -   22 96% 39 93% 5 36% 175 54%
보리 6 17% 6 10% 18 33% 55 76% -   22 96% 39 93% 11 79% 157 48%
✽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 권4, 화식(貨殖), 팔역장시(八域場市)
✽(  )는 전체 장시 중 거래 물품이 기록된 장시이며, %는 거래 물품이 기록된 장시를 기준으로 곡물의 거래비율을 계산한 것이다.

도성의 백성들이 지금 20여만 명으로 하루에 2승(升)씩 계산하면 1년에 100만 석의 쌀이 필요합니다. 지금 지방의 각 창고와 공가(公家)에서 거두어들이는 미곡은 대략 합하여 20만 석 미만이고, 개인 집의 곡물은 사대부나 부유한 집이 적고 가난한 집이 많아 집집마다 추수하여 성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모두 20만 석 미만이니 쌀의 귀함이 이와 같습니다.51)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540책, 정조 7년 9월 9일.

서울에서 한 해에 소비할 쌀의 충분한 양은 100만 석이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20만 석, 서울 사람들이 추수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이 20만 석으로 불과 40만 석만 서울로 들어왔다. 결국 60만 석이 해마다 부족한 상태였다. 서울은 행정 관료, 군인, 장사꾼 등이 집중 거주하는 곳이었다. 또한 주위에 평야 지대가 없기 때문에 쌀 부족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부족한 쌀을 지방에서 사다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쌀이 상품화되었고, 쌀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상인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쌀과 곡물의 유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국가에서 필요한 세 곡(稅穀)은 대부분 바다와 강의 물길을 따라 배로 운송하였다. 또한 바다와 강의 물길이 동시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즉 각 지방에서 소출된 미곡과 곡물은 한강·낙동강·금강 등의 수로와 해로를 통해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또한 비교적 적은 양을 거래하는 소상인들은 길을 따라 걸어서 물품을 유통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경작한 곡물을 가까운 장시에 내다 파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의 노점상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서울의 경우 쌀과 갖가지 곡물 유통은 종로와 한강의 마포·서강 지역의 시전(市廛)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미곡을 판매하는 시전으로는 종로의 철물교 서쪽 상미전(上米廛)과 철물교 동쪽 하미전(下米廛), 남대문 밖 문외미전(門外米廛), 서강에 있었던 서강미전(西江米廛), 마포에 있었던 마포미전(麻浦米廛) 등이 있었다. 잡곡을 파는 가게로는 철물교 서쪽의 잡곡전(雜穀廛)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상미전과 하미전, 잡곡전과 문외미전 등의 시전 상인이 쌀과 곡물 거래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국가에 일정한 양의 국역(國役)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쌀과 곡물 거래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위임받았다. 이들은 상품 거래를 통해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지만 영업에 대한 영역 범위나 거래 품목의 규정이 애매하여 서로 이권을 두고 자주 분쟁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고 마포와 서강에 기반을 둔 경강 상인(京江商人)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더욱이 서울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유통이 확대되면서 과거의 시전 조직으로는 발달된 유통 경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갈수록 서강미전과 마포미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갔다.

조선 후기 쌀과 곡물을 거래하는 상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사람들은 한강 연변에서 활동한 경강 상인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조선 초부터 세곡 운송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은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마포(麻浦)·동작진(銅雀津) 등 한강 변의 나루터에서 도강업(渡江業)에 종사하거나 소규모 상인으로 출발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 나 이들 가운데 점차 자본을 모아 커다란 선박을 여러 척 소유할 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취급하던 물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쌀과 갖가지 곡물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서울 도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계유지가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울에서의 쌀과 곡물 유통은 경강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경강 상인은 배를 이용하여 각 지방에서 수로와 해로를 통해 서울로 올라온 미곡을 경강에서 매점함으로써 서울의 곡물가를 조종하였다. 이들이 미곡을 쌓아 놓고 10배의 이익이 나기를 기다려 시전에 풀어 놓지 않는 까닭에 쌀값이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라든가, 한강변의 부유한 무리가 쌀을 사서 쌓아 두었다가 쌀값이 오른 후에도 팔고 있지 않아 서울의 쌀값이 그들의 손에 좌우되고 있다는 말은 모두 경강 상인의 미곡 매점 양상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들은 공인(貢人)에게 지급되던 공미(貢米)를 도매함으로써 쌀값을 조종하여 이윤을 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돈을 주조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쌀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가 쌀값이 오른 후에 되팔아 이익을 남기곤 하였다. 돈이 주조되면 이른바 돈은 천하고 쌀이 귀한(錢賤米貴) 양상이 종종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흉에 따라 형성되던 지역 간의 쌀값 차이를 이용하여 서울에 쌓아 놓았던 쌀을 값이 비싼 지역으로 옮겨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이 많은 양의 쌀을 오랜 기간 매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 간의 쌀값 변동폭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한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결국 경강 상인은 넓은 조직망과 튼튼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미곡 도고상(米穀都賈商)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시전 상인이 서울에서 쌀과 갖가지 곡물의 유통을 주도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경강 상인과 사상(私商)의 역할이 확대되면 서 유통 구조가 변화되었다. 즉 조선 전기에는 선상(船商)·향상(鄕商)→여객 주인(旅客主人)→시전 상인→중도아(中都兒, 도매상인)→행상→소비자의 형태로 물자 유통이 이루어졌다. 지방의 상인이나 선상들이 곡물을 가지고 서울에 오면 먼저 경강 등지의 여객 주인에게 상품을 넘기고, 여객 주인은 다시 시전 상인에게 상품을 인도하며, 시전 상인은 중간 도매상인 중도아에게 넘기거나 직접 소비자에게 팔기도 하였고, 중도아는 소비자 아니면 행상에게 넘겨 소비자에게 물건을 파는 구조로서 유통체계의 중심에 시전 상인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경강 상인이나 사상들이 한강의 포구나 시전 상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가까운 장시인 송파장(松坡場, 서울시 송파구 석촌 호수 부근)·사평장(沙平場,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부근)·송우장(松隅場, 경기도 포천)·누원점(樓院店, 서울시 노원구 일대) 등지에서 물건을 매점하여 두었다가 서울의 시장인 이현(梨峴, 서울시 종로구 종로 4가 부근)과 칠패(七牌, 서울시 서대문 밖)를 통해 직접 소비자에게 물건을 파는 독자적인 유통 구조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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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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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강 상인의 역할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1833년(순조 33) 발생한 쌀 폭동 사건이다.52) 이 사건에 관해서는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의 발달』, 고려대출판부, 1973, pp.84∼91에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사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쌀을 도매하던 동막(東幕) 여객 주인 김재순(金在純)이 경강의 여러 여객 주인을 지휘하여 쌀 판매를 통제하였고, 나아가 서울 시내의 미전에도 쌀 매매를 중지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쌀값이 폭등하게 만들었다. 한양의 쌀값이 크게 뛰어오르자 격분한 도시 빈민층들이 미전을 방화, 파괴하고 쌀을 매점해 둔 경강 상인의 가옥 15호를 불 질렀다. 이 사건은 경강의 여객 주인이 시전 상인보다 주도적으로 쌀값을 조절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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