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1. 상업적 작물의 생산과 상품화
  • 만병통치로 알려진 산삼은 금수품이었다
이상배

오늘날 ‘고려삼’은 외국에서 그 가치를 더 많이 알아주는 최상의 상품이다. 지금의 삼은 대부분 재배하는 인삼(人蔘)이지만 옛날에는 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채취하는 산삼(山蔘)이었다. 지금도 심마니가 산삼을 캤다는 소식을 이따금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삼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쳤으며, 과거에는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하였을까?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상품화가 되었고, 어떻게 거래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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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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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은 두릅나뭇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 식물인데 예로부터 아주 귀한 약재로서 효능과 가치가 인정되어 진귀한 물품으로 여겼다. 가치가 높은 만큼 일찍부터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과 무역하는 주요 품목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약재가 아니었고, 희귀성이 높아 국가에서는 법 적으로 국외 유출을 막고 있었다.

처음에는 산속 깊은 곳에서 자란 산삼을 ‘심’이라고 불렀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이나 『제중신편(濟衆新編)』에는 인삼의 옛 이름을 ‘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호칭하는 은어인 ‘심마니’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함경남도에서는 산삼을 캐는 사람을 방초(芳草)라고도 불렀다. 산삼은 항상 수요는 많으나 공급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산삼을 대신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찾아낸 것이 밭에 삼을 심어 기르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인삼은 곧 재배한 삼을 의미하며, 산에서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란 삼은 이와 구별하기 위해 산삼이라 부르고 있다.

삼이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등 동양에서 주로 생산·이용되었다. 인삼에는 홍삼(紅蔘)과 백삼(白蔘)이 있다. 백삼은 흙에서 캔 삼을 그대로 말린 것이며, 홍삼은 그것을 가마에 넣고 쪄서 붉은 빛이 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백삼은 오래 지나면 변질될 수 있지만 홍삼은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삼을 한자로 표기할 때 ‘人蔘’이라고 쓴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人參’이라고 쓰고 있다. 왜 같은 동양의 한자 문화권인데 글자가 다를까? 그것은 조선시대 ‘參’ 자를 행정 용어나 관직 용어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궐 안에서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는 것을 참알(參謁)이라 하고, 의정부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참찬(參贊)이라 불렀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인삼의 ‘삼’ 자 위에 초두머리(艸)를 더하여 사용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인삼의 희귀성과 약효를 인식하고 국가에서 필요한 인삼을 공인(貢人)을 통해 조달하였다. 인삼은 왕실, 충훈부(忠勳府)·의정부(議政府)·병영(兵營)·중추부(中樞府)·종친부(宗親府)·호조(戶曹) 등 정부 관청에서 의약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품(朝貢品)과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사절단의 경비, 일본과 대마도에 보내는 하사품과 무역 품목 등에도 사용되었다.

조선 정부는 인삼을 조달하기 위해 각종 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국가의 토지를 이용하여 삼을 재배하는 농가는 현물로 인삼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현물 납부가 어려울 경우에는 포(布)나 쌀 혹은 돈을 대신 받았다.

인삼의 징수 지역은 함경도·강원도·평안도·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왕조 실록』,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 최대의 인삼 산지는 강계(江界)였고, 이곳을 포함하는 평안도가 500∼600근으로 전국에서 납부량이 제일 많았다. 다음이 강원도 지역으로 인삼 67근에 돈 5,233냥과 쌀 1만 5000석을 납부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인삼 값이 정해져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인삼 몇 근이라고 환산할 수는 없지만 평안도 못지않게 부담되는 액수임에는 틀림없다. 경상도는 42근 1냥을 납부하였지만 모두 이 지역의 가장 우수한 품질이었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삼은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등 국가의 중앙 의료 기관에서 약재로 사용하였다. 함경도에서 올라오는 인삼은 품질이 낮아 포로 대신 납부하였는데 모두 75동 40필이었다. 이 액수는 숙종 때를 기준으로 대략 인삼 110근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한편 정부에 인삼을 공급할 수 있는 상인들은 선혜청(宣惠廳)에 등록된 공인들이었다. 조선시대 선혜청에 등록된 공인 중에 인삼을 전문으로 취급한 사람들은 관동 지역의 인삼을 취급하는 관동삼계인(關東蔘契人), 세삼공인(稅蔘貢人), 인삼공물주인(人蔘貢物主人), 돈삼계공인(獤蔘契貢人)과 정조 때 특별히 재배 인삼인 가삼(家蔘)의 매매 독점권을 부여받았던 미삼계인(尾蔘契人) 등이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일정한 양의 인삼 값을 미리 받고 현지에 가서 인삼을 구해 납품하였는데, 종종 미리 받은 인삼 값이 현지의 인삼 값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일정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으 나 인삼 가격이 계속 급등함에 따라 점차 정부에서 받는 돈과 현지에서 구입하는 인삼 값의 차이가 커 이익을 내지는 못하였다. 이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인삼 유통은 사상(私商)과 은밀하게 밀거래하는 잠상(潛商)의 손으로 넘어갔다.

인삼이 국가의 금수품(禁輸品)이었기 때문에 사상들의 인삼 유통도 여러 절차의 통제가 뒤따랐다. 예를 들어 인삼의 주산지였던 강계에서 사상들이 인삼을 사서 매매하려면 국가의 엄격한 통제와 확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였다.

① 강계 지방의 사상은 강계부에 세금을 직접 납부한다.

② 동래 상인이나 송도 상인 등 외지의 사상들은 호조(戶曹)에서 인삼을 거래할 수 있다는 허가증인 황첩(黃帖)을 발급받는다.

③ 강계 지방에 들어갈 때는 평안도 감영에 매매에 따른 십일세(什一稅)를 먼저 납부한다.

④ 황첩을 지니고 십일세를 납부한 자에게 강계 부사가 공문을 발급한다.

⑤ 공문을 가지고 강계에 들어가면 접주인(接主人)의 안내에 따라 관에 보고한다.

⑥ 접주인의 안내에 따라 인삼 채취인과 인삼을 거래한다.

⑦ 인삼 거래 후 관에서 일일이 대조하여 누가 어디서 얼마만큼의 인삼을 거래하였는지를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고, 관에서는 비변사에 그 결과를 보고한다.

⑧ 서울에서 매매할 때는 15냥까지는 자유롭게 매매하되 1근 이상을 매매할 경우에는 반드시 호조에 보고하여야 한다. 또한 왜관(倭館)에서 매매할 경우에는 십일세를 동래부에 납부하고, 정해진 인원이 개시(開市)에 참여하여 인삼을 무역하되 무역량을 보고하여 이에 대해 세금을 부과한다.53) 오성, 『조선 후기 상인 연구』, 일조각, 1989, pp.25∼29.

엄격한 절차를 거쳐 인삼을 매매하였기 때문에 합법적인 거래로는 큰 이익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상들은 불법 행위인 밀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밀무역은 위험 부담이 큰 만큼 이익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정조 때 경주인(京主人)인 김중서(金重瑞)는 부정한 방법으로 인삼을 매매하여 치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강계의 경주인인 김중서는 매우 간교한 사람으로 수십 년 동안 인삼 무역을 빙자하여 강계에 오래 체류하였습니다. 그는 삼을 재배하는 집에 미리 싼값을 지급하고 하산(下山)한 후에 관에 납부하지 않고 몰래 사고팔면서 마침내 도고(都賈)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근래에 강계의 인삼이 아주 귀해졌습니다.54)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60책, 정조 13년 정월 10일.

이 사료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고 있던 김중서가 인삼을 무역하여 돈을 축적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삼을 재배하는 농가에 미리 돈을 주고 상품을 독점한 후 정부에 알리지 않고 밀무역을 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오늘날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밭떼기’의 한 형태로 상품을 독점한 후에 부정한 방법으로 매매하여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17세기 중반 조선의 인삼은 국제 무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겠다는 요구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삼의 대외 수출은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결국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자연삼(산삼)이 끊어지고, 삼의 인공 재배가 폭넓게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인삼은) 근래 수십 년 전부터 산에서 나는 것이 점차 고갈되어 집에서 재배하는 방법이 영남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졌는데 그것을 가삼(家蔘)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55) 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관휴지(灌畦志) 권4, 약류(藥類) 인삼.

이는 인공 재배를 통해 얻은 인삼을 가삼이라 불렀고, 가삼 생산은 영남 지역에서 처음 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가삼은 중국의 거대한 인삼 시장과 결부되어 크나큰 부를 형성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빈농이든 부농이든 가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삼은 생산에서 수확까지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빈농은 인삼을 재배하기 위한 자본 여력이 없었고, 일부 부농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인삼을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인삼 재배는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기도·황해도·강원도 등지로 급격히 확산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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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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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인삼 재배에 가장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활동한 사람들은 개성 상인이었다. 개성은 토양과 기후가 인삼 재배에 매우 적합하여 19세기 말에는 개성 지방에 살고 있는 농민과 상인들이 1,000여 간 이상 규모의 삼포(蔘圃)를 설치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개성 상인들은 누구보다도 상인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막대한 상업 자본과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삼 재배 이전부터 인삼의 판매처인 동래 상인이나 역관(譯官), 경상(京商)과 안주 상인(安州商人), 강계의 삼상(蔘商) 등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삼의 대량 생산에 뛰어들 수 있었다.

개성 상인들은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증포소(蒸包所)를 개성에 설치하고 상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의주 상인은 포삼 별장(包蔘別將)을, 개성 상인은 포삼 주인(包蔘主人)을 각각 담당하여 청나라로의 홍삼 수출권을 장악하였다. 포삼 주인이란 청나라로 수출하는 인삼의 조달을 담당한 사람으로 인삼 재배에서 매매까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상권의 지배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밀매에 뛰어든 것은 그만큼 큰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육로를 통한 밀수를 강력히 규제하면 밀무역상들은 심지어 해상의 선박에서 만나 밀매할 정도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막대한 상업 자본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는 점차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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