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1. 상업적 작물의 생산과 상품화
  • 담배는 조선 후기부터 상품화되었다
이상배

[담배는 조선 후기부터 상품화되었다]56) 담배와 관련해서는 이영학의 「18세기 연초의 생산과 유통」, 『한국사론 13, 서울대국사학과, 1985 ; 「조선 후기 상품 작물의 재배」, 『외대사학』 5, 한국 외국어 대학교 신학 연구소, 1993의 자료를 주로 이용하였다.

담배는 가짓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 식물이다. 1558년 스페인의 필리페 2세(Philip Ⅱ)가 원산지인 남아메리카 중앙부 고원 지대에서 종자를 구해 관상용·약용으로 재배하면서부터 유럽에 전파되었다. 현재는 북위 60°에서 남위 40°에 걸쳐 전 세계에서 재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담배에는 니코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중독성이 강하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담바고’ 혹은 ‘남령초(南靈草)’라고 불렀으며, 뒤에는 ‘남초(南草)’ 또는 ‘연초(煙草)’라고도 하였다. 담바고는 타바코(Tabaco)라는 외래어 발음에서 유래되었고, 남령초는 ‘남쪽 국가에서 들어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담배가 처음 유입되었을 때 단지 약초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차츰 기호품으로 흡연하기 시작하였다. 기호품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흡연에 따른 해로움을 알게 되어 흡연의 찬반양론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4)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담배를 피울 때의 이 로운 점 다섯 가지와 해로운 점 열 가지를 언급하였다. 이로운 점은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 비위가 거슬려 침이 흐를 때, 소화가 되지 않아 눕기가 불편할 때, 상초(上焦)에 먹은 것이 걸려 신물을 토할 때, 추운 날씨에 한기를 막을 때’ 이롭다고 하였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언급한 것은 아니다. 해로운 점은 ‘안으로 정신이 해롭고, 밖으로 눈과 귀가 해롭고, 머리칼이 희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이가 빠지고, 살이 깎이고, 사람이 노쇠해진다’고 지적하면서 좀 더 심한 것으로 세 가지를 더 지적하였다. 냄새가 심해서 제사를 올릴 때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여 신과 사귈 수 없는 것이 하나이고,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 둘이며, 세상에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셋이라고 하였다.57) 이익(李翼), 『성호사설(星湖僿說)』 상, 만물문(萬物門), 남초(南草). 이처럼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많다고 하면서 연초의 폐해를 주장하고 있다.

성호가 이러한 의견을 낸 것을 보면 당시에 연초 흡연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표착(漂着)하였던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92)이 『하멜 표류기』에서 “현재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 아이들이 네다섯 살 때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할 정도로 17세기 중반에 이미 흡연자가 많았다.58) 이병도 역주, 『하멜 표류기』, 조선국기(朝鮮國記), 일조각, 1954, p.86. 심지어 영조 때는 흉년이 들어 관청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쌀을 연초와 바꾸어 피우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담배가 널리 애용되자 사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유득공(柳得恭, 1748∼?)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조관들이 거리를 나갈 때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며, 재상이나 홍문관 관원이 지나가는데 담배를 피우는 자가 있으면 우선 길가 집에다 구금시켜 놓고 나중에 잡아다가 치죄한다.”는 기록이 있다. 담배가 유입된 직후에는 이와 같은 통제가 없다가 흡연자가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너도나도 기호품으로 애용하자 지배 계층이 신분 질서에 맞는 사회 예절을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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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러한 담배는 당시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이것을 한 눈에 보여 주는 자료를 오늘날 경상도 민요인 담바귀타령에서 찾을 수 있다.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은을 주려 나왔느냐 금이나 주려고 나왔느냐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저기 저기 저 산 밑에 담바귀 씨를 솔솔 뿌려…….59) 성경인·장사훈 편, 『조선의 민요』, 담바귀타령, 1949, pp.232∼236.

담배가 일본에서 동래와 울산을 거쳐 유입되었다는 것과 담배 가격이 금은과 같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인조 때는 담배 한 근의 가격이 은 한 냥과 같았고, 숙종 때는 담배를 뇌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숙종 때 한 가족 여덟 명이 담배를 피우는 데 드는 비용이 10문(文)이었고, 사대부 중에서 연초를 피 는 경우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을 먹는 것과 같은 비용이 든다고 하였다.

더구나 담배 수요가 전국적으로 증가하면서 가격 또한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리하여 지방에서 연초를 가지고 서울로 와 비싼 가격에 파는 경우도 많았다.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청구야담(靑邱野談)』에는 영조 때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논밭을 모두 팔아 그 중 500냥을 주고 담배를 사서 서울로 지고 가 3,000냥을 받고 팔아 무려 여섯 배의 이익을 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60) 『청구야담(靑邱野談)』 권7, 금초상고의양재(衿草商高義讓財). 이런 사례는 담배 값이 산지보다도 대도시에서 훨씬 비쌌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 조선시대 담배는 주로 어디에서 생산되었을까? 17∼18세기의 사료들에 의하면 담배는 주로 전라도의 진안(鎭安)과 장수(長水), 평안도의 삼등(三登)·성천(成川)·강동(江東)·평양(平壤), 황해도의 신계(新溪)·곡산(谷山)·토산(兎山), 강원도의 금성(金城)·안협(安峽), 충청도의 정산(定山), 경상도의 영양(英陽)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진안과 삼등의 담배는 품질이 매우 우수하여 진삼초(鎭三草)라 불렸고, 중국 사신에게 주는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진안은 마이산(馬耳山) 아래에 있는데 토양이 담배 재배에 알맞다. 무릇 경내의 높은 산꼭대기라도 남초를 심으면 잘 자라서 주민들은 대부분 이것으로 업을 삼는다.”고 할 정도로 담배를 재배하는 가정이 많았다.61)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또한 1798년부터 1804년 사이에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이 저술한 『천일록(千一錄)』에는 “평안도 삼등 지역의 토양이 담배 재배에 알맞아 향초(香草)로서 아주 우수하다.”고 할 정도로 진안과 삼등의 담배는 다른 지역의 담배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렸다.

조선 후기의 담배 재배 기술은 유중림(柳重臨, ?∼?)이 저술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잘 기록되어 있다. 연초를 파종하는 방법은 한 곳에서 싹을 틔워 두세 잎이 생기면 비가 온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 심 는 이식법(移植法)을 사용하였다. 싹을 옮겨심기 이전에 재배할 땅에 낙엽과 같은 천연 거름을 두껍게 깔아 쟁기로 갈아엎어 썩힘으로써 지력(地力)을 북돋아 주었다. 싹을 옮겨 심은 후에는 줄기의 길이가 30cm 정도 이상이 되면 줄기의 끝을 잘라 예닐곱 개의 잎만 남겨 두고, 매일 새롭게 돋는 순을 잘라내 잎이 크고 두껍게 되도록 관리한다. 수확할 때가 되면 잎을 세 차례에 걸쳐 따서 햇빛이 아닌 처마 밑처럼 그늘진 곳에서 서서히 말린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담배를 재배하여 경강 상인에게 판매한 이야기가 『청구야담』에 전한다. 이 이야기는 여주에 사는 허공(許珙)이라는 사람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밭에 담배를 일구는 장면과 이것을 상품화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밭에는 담배 모를 옮겨 심기 위해 거름을 두껍게 깔고 이랑 위에 무수히 구멍을 뚫고 비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가뭄이 들어 담배 모종이 시들까 염려하여 이른 봄에 장행가(長行架, 담배 모판을 덮는 시설)를 매고 그 아래 담배씨를 파종하여 자주 물을 주었다. 그해 마침 크게 가물어 도처의 담배 모종이 전부 말라 죽었으나 허공의 담배 모판은 유독 무성하였던 것이다. 비가 오자 즉시 옮겨 심었더니 오래지 않아 담배 잎사귀는 파초처럼 너푼 너푼 땅을 덮었다. 담배가 약이 차기도 전에 강상(江上)의 연초 상인이 찾아와서 담배 밭이 통째로 200꿰미에 흥정이 되었다. 담배 장수는 잎사귀를 따서 모래사장에 말려 가지고 가더니 후에 다시 100냥을 가지고 와서 그 순도 사가지고 돌아갔다.62)이우성·임형택 역편, 『이조한문단편집』 상, 일조각, 1973, p.14.

이 기록에도 나타났듯이 담배 싹을 옮겨 심을 때는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땅의 힘을 최대한 북돋아 주었고, 인삼을 재배할 때 햇빛을 가리는 시설을 하듯이 담배 재배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조선 후기 거대한 상업 자본을 가지고 있는 대도시의 상인들이 담배 원산지에 가서 직접 밭을 통째로 매점매석하는 일명 ‘밭떼기’의 유형을 보여 주고 있다.

담배 재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즉 곡물 농사를 짓는 것보다 두 배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제때에 모를 옮겨 심을 때와 수확할 때, 병충해를 제거하는 일이나 담뱃잎을 건조시키는 일 등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다. 이에 필요한 인력은 품삯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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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담배를 재배하는 지역은 대부분 산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배수가 잘되고 지력(地力)이 좋아야 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일반 평야 지대보다는 산이나 계곡 등지에 밭을 일구어 연초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각지에서 재배된 담배는 객주(客主)·여객(旅客)·보부상(褓負商)·소상인 등을 통해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의 대도시로 유통되었다. 지방에서는 장시를 통해서, 서울에서는 담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연초전(煙草廛)이나 담뱃잎을 썰어서 판매하는 절초전(折草廛), 담뱃대와 재떨이를 판매하는 연죽전(煙竹廛) 등의 상가를 통해서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되었다.

지방의 소상인이나 보부상은 연초 산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은 양을 사서 대도시의 장시에 가져가 비싼 값에 판매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자금이 풍부한 거상(巨商)들은 담배 산지에서 직접 많은 양을 사서 객주나 여객을 통해 대도시와 군사 요충지 등에서 비싼 값에 소비자에게 판매하였다. 지방에서도 인구가 밀집해 있는 대도시에서는 담 배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어 전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큰 포구였던 강경(江景)에도 남초전(南草廛)이 있었고, 평양에도 절초전이 있었다. 경상 우수영이 있는 고성(固城)의 남문 밖에 있었던 남초전에서는 영남 상인 수백 명이 모여 담배를 매매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임원경제지』에는 전국 지방의 비교적 규모가 큰 325개의 장시 가운데 181곳에서 담배를 거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경기도 18개, 호서 23개, 호남 15개, 영남 45개, 관동 4개, 해서 22개, 관서 41개, 관북 13개 장시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율은 담배가 곡물류, 직물, 소금의 뒤를 이어 가장 많이 거래되는 품목임을 말해 준다.

서울에서는 종로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부는 대외적으로 중국 사신에게 줄 담배의 지속적인 공급과 국내 담배를 수집하는 기관이 필요하였다. 당시 중국 사신에게 주던 담배는 왜지삼(倭枝三)과 진안과 삼등에서 생산된 진삼초가 주를 이루었다. 왜지삼은 담배를 잘게 썰어 만든 것으로 당시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온 고급 담배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국가에 납품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였다. 이를 만족시켰던 것이 연초전이다. 비록 육의전의 하나로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연초전은 왜지삼과 진삼초를 국역(國役)으로 부담하는 대신 담배 공급과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지방 산지에서 담배를 매입한 향상(鄕商)으로부터 상품을 공급받아 서울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에게 판매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연초전 외에 절초전도 있었으나 판매권을 둘러싸고 연초전과 빚은 갈등 때문에 1742년(영조 18)에 완전 폐지되었다. 나아가 연초 판매로 연초전 상인의 이익이 늘어나자 일부 양반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담배 유통 체계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사상들이 등장하여 시전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정조 때 기록은 이러한 현상을 자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서울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양반이 지방에서 절초와 남초를 널리 사들여 서울에 들어와 난매(亂賣)하고 있고, 부민(富民) 이덕신(李德臣)이라는 사람도 매년 지방에서 절초를 널리 사들여 감추어 두었다가 난매하니 각별히 엄금해 주십시오.63) 『비변사등록』 168책, 정조 10년 1월 5일.

담배 판매 이익이 다른 상품에 비해 컸기 때문에 이익을 탐하는 각종 세력이 이 상품의 매매에 뛰어들면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나아가 18세기 말에는 각 도에서 가져온 담배 거래를 알선해 주고 구문(口文)을 받거나 도고(都賈)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남초 여객 주인(南草旅客主人)이라 하였다.

결국 서울에서의 담배 유통은 남초전의 시전 상인과 사상, 그리고 남초 여객 주인 등이 경쟁적으로 담당하였다. 이러던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상의 힘이 시전 상인을 능가하게 되어 시장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초전과 남초 여객 주인은 사상의 거래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면서 대가로 구문을 받는 신세로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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