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1. 상업적 작물의 생산과 상품화
  • 웰빙 식품인 채소도 상품화되었다
이상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채소는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소·닭·돼지 같은 육류 섭취가 어려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먹을 반찬이라고는 채소뿐이었다. 그리하여 평민은 대부분 텃밭에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하였고, 양반은 노비를 통해 농사지은 채소를 먹었다. 그리고 일부 땅이 없는 서민과 왕실이나 관아에서는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25년(세종 7) 시중에서 생선이나 채소 등 잡물을 매매하는 자가 많아 동전 사용이 어려우니 물물 교환을 중지하자는 의견이 있었고,64) 『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6월 을묘. 1445년(세종 27)에는 아침저녁으로 채소 값의 변동이 심하여 이를 팔아서 먹고 사는 백성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후로는 채소, 아욱 등의 식물 가격을 경시서(京市署)에서 정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65) 『세종실록』 권110, 세종 27년 12월 임자. 이와 같은 기록은 조선시대에 일찍부터 채소가 상품으로 거래되 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도 많은 양의 채소를 소비하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채소를 진상(進上) 품목으로 정하여 제철에 맞는 채소를 올리도록 하였고, 지방에서는 미처 자라지 않은 채소를 흙과 함께 중앙으로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지방에서 중앙까지 운송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채소가 시들거나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성종 때는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채소가 완전히 자란 다음에 운송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66) 『성종실록』 권28, 성종 4년 3월 갑진 ; 『연산군일기』 권57, 연산군 11년 3월 경술. 또한 정조 때에는 채소의 공급을 각 관청에서 정해진 규칙에 의거하여 공인(貢人)에게 올리도록 하였다.67) 『일성록(日省錄)』 정조 3년 7월 10일. 이것은 공인들이 채소 생산자에게서 물품을 구매하여 정부에 납품하는 기록으로 채소의 상품화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채소의 상품화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좀 더 확대되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십리에서 무우, 살곶이다리에서 순무, 석교에서 가지·오이·수박, 연희궁에서 고추·부추·해채, 청파에서 미나리, 이태원에서 토란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반은 상상전(上上田)에 심고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가꾸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엄행수는 매년 6,000전을 벌기에 이른다.68) 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별집(別集),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이 기록에는 엄행수(嚴行首)란 사람이 채소를 심어 1년에 6,000전을 벌었다는 내용과 한양 근교의 지역별 채소 생산 품목이 나타난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와 성동구 일대에서는 무가 많이 재배되었고, 용산구 일대에서는 미나리와 토란이, 서대문구에서는 고추와 부추 등이 주로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채소는 소규모 상인들이 도성 안으로 들여와 판매하거나 혹은 채소전을 통해 매매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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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채소 시장
남대문 채소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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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유사한 것으로 19세기 중반에 나온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채소전(菜蔬廛)에서는 각종 채소를 매매하는데 종루와 칠패에 있다. 그리고 동문 밖 왕십리 전관평(箭串坪)의 무와 동대문 안 훈련원의 배추, 남대문 밖 청파동의 미나리가 으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69) 『한경지략(漢京識略)』, 시전(市廛),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6. 역시 지역에서 생산되는 주요 채소 품목이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종로와 칠패에 있는 채소전을 통해서 주로 매매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채소들이 전래되면서 음식 문화에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우리의 식생활과 매우 밀접한 배추와 고추가 대표적 예이다. 조선 전기에는 겨울에 김장을 담그는 포기 배추가 없었다. 또한 고추가 들어오지 않아 붉은 고춧가루도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히 포기 없는 배추와 무를 소금에 절여서 마늘 등 양념을 한 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고추가 17세기 초엽 일본을 통해 전래되었고, 18세기에는 중국에서 포기가 큰 배추가 전래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서울에 고초전(藁草廛)이 생겼으며, 채소의 종자를 파는 종자전(種子廛)도 있었다.70) 『한경지략』, 시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6. 그리고 포기 배추와 고추가 결부되어 두 종류를 버무리는 형태의 김치가 나타나게 되었고, 오늘날 겨울이면 집안마다 담그는 형태의 붉은 김장김치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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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배추김치
통배추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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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옥수수, 호박, 토마토, 고구마, 감자 등도 조선 후기에 들어온 식품이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들여 온 고구마와 1820년대 무산 군수 이형재(李亨在)가 청나라에서 들여 온 감자는 구황 식물(救荒植物)로서 높은 인기를 얻어 재배지가 확대되었다. 옥수수는 17세기 이후에 전래된 곡물로 『증보산림경제』에 심는 방법과 먹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채소 재배가 이루어졌고, 이 상품들은 도성 안에서 주로 매매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새로운 품종의 채소가 등장하면서 음식 문화의 변화도 일어났다. 서울의 예를 통해 볼 때 지방 대도시 주변에서도 같은 형태의 상품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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