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2. 수공업의 발달과 민영화
  • 조선시대 최대의 국립 공업 단지는 한양이었다
이상배

조선시대 수공업과 관련된 관청은 모두 한양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한양은 전국에서 가장 결집된 수공업 단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양에 궁궐과 관아가 집중적으로 배치되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수공업 제품을 가까이에서 신속히 조달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의 종로와 중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 종로에는 공조를 비롯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안에 상의원과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다. 이 밖에도 수공업 관련 작업장이 종로에 산재해 있었는데 당주동의 내섬시(內贍寺)와 봉상시(奉常寺), 원서동의 사도시(司䆃寺)와 관상감(觀象監), 도렴동의 의영고(義盈庫), 명륜동의 양현고(養賢庫), 적선동의 사온서(司醞署)와 장흥고(長興庫), 견지동의 도화서(圖畵署)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업장은 공조·상의원·사옹원·조지서 등의 작업장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장인의 수도 적었으나, 대개 궁궐에 납품하는 물건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이 뛰어났고, 자연히 제품도 우수하였다.

공조는 조선시대 육조의 하나로 서부 적선방 육조 거리 서쪽 오늘의 세종 문화 회관 자리에 있었다. 그 안에는 영조사(營造司)·공치사(攻治司)·산택사(山澤司)의 세 개 부서가 있으며, 이 부서에 소속된 장인이 260여 명이다. 이 가운데 공치사는 초립·망건 등의 모자, 가죽신 등 신발, 금·은·옥 등의 세공품, 궁궐에서 필요한 가구 등을 주로 제조하였다.

상의원은 왕실의 의복을 만들었으며, 때로는 궁중의 보물 등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상의원에는 587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고, 68종의 전문 분야로 나뉘어 분업적으로 옷을 만들었다. 머리에 쓰는 모자에서 발에 신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각 물건마다 만드는 사람이 다를 뿐 아니라, 옷 한 가지에서도 겉옷·속옷·외투·저고리·바지·치마 등의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각기 달랐다.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기본 구조를 재단하고, 바느질하고, 다림질하고, 옷에 무늬를 놓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분업이 철저하였다.

사옹원은 궁궐 안에서의 음식 마련과 음식을 담는 그릇 만들기를 주관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 분원에 사기를 만드는 장인 350명을 파견하여 사기그릇을 만들었다.

선공감은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었으며, 별도로 창덕궁 금호문 밖에 분감(分監)을 설치하였다. 선공감에서는 궁궐 안의 토목·건축을 담당하였는데, 346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제용감은 국왕이 신하들이나 외국 사신에게 내려 주는 의복과 옷감의 염색 및 직조를 담당하였다. 오늘날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으며, 방직장(紡織匠)·청염장(靑染匠)·침선장(針線匠) 등 13개 분야 108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확대보기
조지소
조지소
팝업창 닫기

조지서는 창의문 밖 탕춘대(蕩春臺), 즉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들던 곳으로 1415년(태종 15) 조지소로 출발하여 1466년(세조 2) 조지서로 개편되었다. 이곳에는 모두 91명의 장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닥나무를 가마에 쪄서 껍질을 벗겨 흑피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불려 껍질을 제거하여 백피를 만든다. 그 후 끓는 잿물에 백피를 표백하고, 표백한 섬유를 방망이로 다듬질한다. 그리고 다듬질한 원료를 녹조에 넣고 거기에 풀을 가하여 종이 원료를 만든다. 이어서 그것을 대발 위에 일정한 분량을 옮겨 종이를 뜬다. 초조한 종이를 한 장씩 떼어 내 건조판에 붙여 말려 완성한다. 이렇게 복잡한 공정을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공정이 분업적으로 이루어져 전문화되어 있었다. 탕춘대 일대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질이 좋은 종이를 만드는 제지 공업 단지였다.

서울시 중구 지역도 종로구 못지않은 관영 수공업장이 설치되어 국가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조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관영 수공업장이 군기시·교서관(校書館)·주자소(鑄字所)·예빈시(禮賓寺)·장악원(掌樂院) 등이다.

군기시는 태평로 1가 일대인 서울 특별시청과 서울 신문사 자리에 있었다. 군기시는 창·칼·검·활·화살·화포·군기 등 군사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던 곳으로 644명의 장인이 있었다. 군기시의 최초 책임자는 고려 말 왜구 소탕에 공이 많았던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었고,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 계승하여 82칸의 청사를 건립하고 무기를 본격적으로 제작하였다. 군기시 작업장에서는 매우 세분된 분업과 순차적 공정에 의해 무기를 제작하였다. 예컨대 화살의 제작 과정을 보면, 목장(木匠)이 화살대를 만들면 각장(刻匠)은 화살대에 깃이나 촉을 붙일 자리를 파고, 생피장(生皮匠)은 화살 깃을, 주장(鑄匠)은 화살촉을 붙였다. 그리고 칠장(漆匠)이 칠을 하고 연장(鍊匠)이 최종적으로 가공하여 완성하였다. 이처럼 한 개의 화살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여러 명의 기술자가 각기 하나씩의 공정을 맡아 분업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교서관은 중구 예관동에 있었으며, 서책의 출판을 위한 일종의 국영 인쇄소였다. 모두 146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활자의 주조에서 서책의 인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 과정이 분업화되어 유기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은 나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목장이 몸통을 만들면 글자를 새기는 각자장(刻字匠)이 목활자를 만든다. 이어 부드러운 개흙을 인판(印版)에 편 다음 목활자를 찍었다가 떼면 오목하게 주형(鑄型)이 생긴다. 이때 주장(鑄匠)이 녹인 구리를 야장(冶匠)이 부어 금속 활자를 만들고, 주조된 활자를 조각장(彫刻 匠)이 곱게 다듬어 완성하였다. 인쇄는 창준(唱準), 사준(司準)이 원고의 글자를 큰소리로 읽으면 수장(守藏)이 글자를 골라 초고 위에 배열한다. 이어서 균자장(均字匠)이 동판 위에 올려놓고 조판하면, 지장(紙匠)이 재단한 종이에 인출장(印出匠)이 인쇄하여 서책을 만들었다.

확대보기
주자소 현판
주자소 현판
팝업창 닫기

오늘날 주자동에 있었던 주자소는 활자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었다. 다양한 활자가 있어야 출판이 쉽기 때문에 구리를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었다. 태조 때의 계미자(癸未字), 세종 때의 경오자(庚午字, 1422)·갑인자(甲寅字, 1434) 등을 만들었고, 세조 때 교서관과 통합되었다. 주자소의 활자 제조를 토대로 세종 때 많은 책자를 발간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한양의 종로와 중구 일대는 조선 최대의 국립 공업 단지로서 전국의 가장 뛰어난 장인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이들은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공정을 통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며, 조선 수공업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 지역 외에도 용산에는 기와를 만들어 내는 와서(瓦署)가 있었다. 기와는 옛날 건축물에 꼭 필요한 자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용산 동쪽에 와서가 있었으며, 별서(別署)를 두고 기와를 구워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와서는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국가의 건축물에 주로 기와를 공급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들에게도 판매하였다.

또한 마포구 하수동 강변에는 조선시대 전국의 선박을 관리하던 전함사(典艦司)의 외사(外司)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필요한 병선(兵船)과 조선(漕船) 등의 선박을 만들었다. 1401년(태종 1)에 전국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곡을 한양으로 운송하기 위한 배 251척을 만들었으며, 1410년(태종 10)에는 군사 훈련을 위한 병선 185척을 만드는 등 이곳은 조선시대 최대의 조선소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