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2. 수공업의 발달과 민영화
  • 공장의 장인들이 사라지다
이상배

조선 전기 수공업은 장인들이 관에서 필요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관청에서 교대로 근무를 하는 관영 수공업 체제였다. 장인은 대부분 양인으로 국가의 통제 아래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였지만, 완전히 정부에 예속된 것은 아니었다. 즉 1년에 몇 달 동안 교대로 관아에 나아가 근무하는 것 이외에 평상시에는 자신의 집에서 물건을 만들어 가까운 시전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하였다. 한 예로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의 장인들은 3개 번으로 나뉘어서 1개월 복무하고 2개월 쉬도록 하여 1년에 4개월을 복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때로는 한 달씩 교대로 근무하여 1년에 6개월을 복무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장인들이 작업장에 동원되지 않는 기간에는 자기 집에서 물건을 만들었고, 이것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리는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군기(軍器)의 경중(輕重)과 장단(長短)은 각각 일정한 제도가 있는데, 지금 각도 연호(煙戶)의 군기를 점검해 보니 무릇 철야장(鐵冶匠)·죽장(竹匠)·목공장(木工匠) 가운데 경박한 무리들이 다투어 이때를 틈타서 이득을 보고자 환도(環刀)와 편전(片箭) 같은 것을 부정(不精)하게 제조하여 저자에 벌여 놓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꼬여서 매우 비싸게 값을 받고 있습니 다. 지금 이후로는 군사 무기를 저잣거리에서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한성부 경시서(京市署)로 하여금 엄격히 금지하도록 하며, 위반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리십시오.71) 『세종실록』 권83, 세종 20년 11월 을사.

환도 같은 무기까지 제작하여 시장에 내다 놓고 파는 지경이었으니 나머지 수공업 제품이야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수공업자들은 고된 피로 속에서도 물건을 제작하여 지금의 종로, 남대문로 연변에 있는 시전에 내다 팔거나, 직접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판매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상품 생산은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한 단순 생산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수요가 늘면서 상품화의 가능성이 높아갔다. 특히 금·은·주석 등 귀금속 세공업에 종사하던 기술자는 재산을 상당히 모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자투리 시간을 써서 만든 제품을 상품화함으로써 약간의 이익을 취하던 장인들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점차 공장을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공장을 벗어난 까닭은 장인에 대한 처우가 점차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먼저 교대 근무제인 번차제(番次制)가 원칙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양반들은 당시 최고의 기술자인 장인들을 개인적으로 압박하여 물건을 만들어 바칠 것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자신의 생계 유지를 위한 제품을 만들 겨를이 없었다. 또한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장인들에게 지급하던 최소한의 양식(料米)도 지급하지 못하자 이들은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결국 처자를 부양하기 힘들어진 장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러한 사례는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말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백공(百工)은 과거에는 월봉(月俸)으로 처자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에 관역(官役)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월봉을 감해 버려 공장(工 匠)들이 처자를 돌볼 수 없으므로 으레 도망할 생각만 합니다. 양인으로 공장이 된 자들도 이 때문에 다 흩어져 버리므로, 부득이 각사(各司)의 종들로 충원하고 있습니다. 각사의 노비가 없어지는 것은 주로 이 때문입니다.72) 『중종실록』 권84, 중종 32년 4월 계유.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장인들은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도망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지금의 장인들은 모두 유명무실합니다. 공조와 선공감(繕工監) 같은 데에도 모두 장인이 없어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민간 장인들을 부리는데 그 장인들도 모두 서투릅니다. 대개 급료가 감소되었으므로 모두들 이 업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73) 『중종실록』 권84, 중종 32년 4월 계유. 한 특진관 조윤손(曺潤孫)의 말에서 보듯이 공노비나 기술력이 떨어지는 민간 수공업자로 충당되었다. 그리하여 양질의 제품 생산이 어렵게 되었으며, 상품 가치 또한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장인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났다.

장인들의 도피가 많아질수록 각 관청의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생산 차질은 심해졌다. 필요한 물품을 만들고자 하여도 만들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분업 체계 속에서 어느 한 공정의 사람만 빠져도 제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민간 수공업자를 일시로 고용해서라도 생산 활동의 차질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민간 수공업자들이 품삯을 받고 관영 수공업장에 고용되어 물건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례는 연산군 때 나타난다.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자주 장인들을 동원하여 물건을 만들도록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신하들에게 줄 선물로 놋화로 대형 50개와 중형 50개, 놋향로 대형 50개와 중형 50개를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인이 부족하여 물건을 제때 만들지 못하자 급료를 주고 민간 장인까지 총동원하여 날마다 관청에서 일을 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고 급료가 많이 지출되어 창고가 빌 정도였 다고 한다.74) 『연산군일기』 권53, 연산군 10년 5월 기해. 이와 같이 관청에 예속된 장인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자 정부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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