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2. 수공업의 발달과 민영화
  • 어떤 제품이 생산되고 상품화되었는가
이상배

조선 전기 수공업 제품의 주요 생산지는 한양 도성 안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도성 밖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영역 확대는 조선 경제의 활성화는 물론 한양의 경제생활에도 활력을 불어 넣기에 충분하여 한양이 조선 후기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 후기 최대 수공업 단지였던 한양에서 생산된 수공업 제품의 실태와 상품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7) 최완기, 「수공업의 발달과 공장제 수공업」, 『서울 상공업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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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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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종로구 관철동을 중심으로 서린동·공평동·관수동 일대에는 서민들의 생활용품을 제조하는 작업장이 곳곳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만든 제품을 직접 매매하기도 하였고, 시전을 통해 판매하기도 하였다. 관철동은 관자골과 철물교라는 지명이 합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자골 일대에서는 금·옥·뿔 등으로 망건의 당줄을 꿰는 관자(貫子)를 만드는 사람이 많았고, 철물교 일대는 칼·솥·문고리 등 철물(鐵物)과 관련된 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관철동에서 관수동으로 이어지는 곳은 갓전골이라 불렀는데 갓을 만들어 파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린동에는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된 죄수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명분 아래 짚신을 삼아 관철동의 혜전(鞋廛)에 내다 팔았다. 관수동에서 장사동에 걸쳐 있던 마을에서는 서민들이 머리에 쓰는 벙거지를 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벙거짓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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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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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2가와 공평동 일대는 각종 놋그릇을 만들어 팔아 바리동이라 하였다. 초기에는 한양, 개성 등 큰 도시 주변에서 놋그릇이 제조되어78) 서유구, 『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 권4, 유장(鍮匠). 곧바로 시장에 출하되었는데, 18세기 말 이후로는 구례·안성·정주를 비롯한 각지에 새로운 놋그릇 생산지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서도 안성과 정주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안성에서는 붓배기를, 정주에서는 방짜를 제조하여 지역별로도 기술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놋그릇 제조는 공정이 분업화되어 3∼4명, 혹은 10명 이상이 한 조가 되어 분업화된 작업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79) 김영호, 「조선 후기 수공업의 발전과 새로운 경영 형태」, 『대동문화연구』 9 특집―19세기의 한국 사회, 1972, p.99. 종로구 서린동 영풍 빌딩 자리에는 금방·은방·옥방이 모여 있어 가락지·비녀·팔찌 등 여인들의 세공품을 만들어 팔았다. 또한 모자·귀마개 등을 만들어 시전에 내다 팔기도 하였고, 소반·문갑·연상 등 목가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부녀자들은 의전(衣廛)에서 옷감 쪼가리를 구해다가 족두리를 만들어 거리에서 팔다가 난전(亂廛)으로 제지되기도 하였다.

당주동에서 신문로 1가에 걸쳐 있는 훈조동(燻造洞)은 메주가마골로서 장 담그는 원료인 메주를 전문적으로 쑤던 곳이다. 메주란 콩을 삶아 찧어서 뭉친 덩이로, 띄워 말려서 간장·된장·고추장을 담글 때 원료로 쓴다. 간장·된장·고추장 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 식품으로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메주를 띄워 말릴 때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왕실이나 양반 가문에서는 이를 기피하여 주로 도성 밖에 메주를 쑤는 곳이 많았다. 서울의 외곽지대인 신영동·부암동·평창동 등에는 메주가마가 도처에 있어 왕실이나 일반 서민들에게 메주를 만들어 공급하였다. 부암동에는 인왕산에서 생산되는 나무들이 있어 숯을 만드는 숯가마가 있었고, 인왕산 기슭의 누상동·누하동에는 갓과 담배쌈지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 거처하였으며, 통의동과 창성동의 띳골이라는 마을에서는 허리띠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판매하였다. 이와 같이 종로구 일대는 인구가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시전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공업이 활기를 띄던 곳이었다.

중구에서 민간 수공업자들이 주로 활동한 곳도 시전이 있는 광통방·대평방·훈도방 주변과 칠패장이 열리고 있는 남대문 밖이었다. 무교동의 도자동은 인근에 도자전(刀子廛)이 있어 장도, 식도 등의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태평로 1가의 쳇골에는 체를 만드는 집이 많았다. 장교동의 청계천변에서는 모자와 신 등을 만들었고, 입정동 일대에서는 장롱과 마구(馬具)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의주로 2가와 쌍림동·묵정동 풀뭇골에서는 주로 철로 만든 농기구를 생산하였다. 풀뭇골이란 풀무를 쓰는 대장간이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한편 도성 밖에서도 수공업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예전에 주성리(鑄城里)라고 하여 남부 한강방에 속해 있던 용산구 보광동은 조선시대 주물을 제작하던 곳으로 가정의 부엌에서 사용하는 솥을 만들었던 곳이다.8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명연혁고(洞名沿革考)』 용산구편, 1980. 또한 옛날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불렀던 것이 한자어로 수철리(水鐵里)로 변한 마포구 신수동과 구수동은 쇠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연모를 만들던 곳이다. 무쇠막은 예부터 정부에 무쇠 솥과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솥을 만드는 바탕을 설치해서 무쇠를 녹여 부었기 때문에 ‘바탕거리’ 혹은 무쇠 공장에서 쓰던 우물을 바탕우물이라 불렀는데 신수동 110번지 일대에 이러한 자연 이름이 남아 있다.8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명연혁고』 마포구편, 1979. 도원동의 산기슭은 메주막이라 하여 메주를 쑤어서 성내 주민들에게 공급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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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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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밖에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아현동 일대에 놋그릇을 제조하는 작업장이 있었으며, 만든 뒤 제품을 판매하는 유기전, 즉 바리전도 아현동 입구에 있었다. 따라서 수공업품을 제조하는 작업장과 완성된 제품을 파는 시전이 함께 위치하여 상호 의존적으로 경제활동을 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또한 일찍이 망건당굴이라 불리던 대현동은 한자어로 마근동(麻根洞)이라 하였는데,82)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서울편, 1966, p.61. 이곳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복장에 반드시 필요한 망건·당줄·감투 등을 만드는 집이 많았다. 조선 사회는 신분에 따라 복장 차이가 있어 선비들은 망건과 감투를 쓰고 외출할 때에는 풀잎이나 말총 등으로 만든 갓을 썼으며, 벼슬아치들은 비단으로 만든 사모를 썼다. 조선 후기 한양에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망건이나 감투의 수요도 많아져 이 들의 상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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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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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일대의 금호동에도 수철장이 있어 무쇠를 다루어 솥·칼·낫 등을 만들었고, 인근에서는 무쇠솥을 걸고 메주를 쑤어서 팔았으며, 뚝섬에는 속칭 숯광골 또는 탄동이란 마을이 있어 강원도 등지에서 뗏목으로 내려온 나무를 숯으로 만들거나, 강원도에서 만든 숯을 옮겨다 보관하였다고 한다.83) 이재곤, 앞의 글, p.65. 삼전동과 청담동의 숯골 등에서도 숯을 만들었다. 금호동의 수철장이나 뚝섬·청담동의 숯쟁이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료를 한강이란 뱃길을 통해 쉽게 공급받을 수 있었고, 또 만든 제품을 가까운 도성 안 사람들에게 매매하기에 편리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제품 생산 규모는 소자본을 갖고 영위된 영세업자들이었다.

이 밖에도 속칭 마전터라 불리던 성북동 골짜기는 흘러내리는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여 도성에서 필요로 하는 포목의 표백과 메주가 생산되었 으며, 송파구와 강동구 암사동의 점말, 동작구 노량진의 동이점·독막, 영등포의 옹기말 등에서는 옹기를 생산하였다. 특히 송파구 일대는 질 좋은 찰흙이 풍성하였고, 가까이에 송파장이라는 큰 소비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등짐장사들이 옹기를 메고 모여들던 곳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송파구 지역에 대대로 옹기를 굽던 가호(家戶) 200여 채가 모두 물에 잠겼다고84)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동명연혁고』 11, 1986, p.179. 한 것을 보면 이 일대에서 옹기 제조가 얼마나 성행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옹기는 그릇의 생김새에 따라 대독·중두리·방구리·항아리·종지·자배기·바래기·뚝배기·옹배기·동이·단지·방통이·소줏고리 등 이름이 다양하다. 화로·시루·약탕관·연적·재떨이·수반·술병 등도 옹기로 만들지만, 옹기라면 흔히 항아리·독을 연상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옹기로 된 항아리를 즐겨 썼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항아리의 나라’라고도 한다.85) 정명호 외, 『옹기』, 대원사, 1991, p.11.

이상과 같이 도성과 주변 지역에서 상품화된 수공업 제품은 대부분 도성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판매되었다. 유통은 제품을 만드는 수공업장을 통해 직접 거래되기도 하였고, 시전이나 이현·칠패·송파장 같은 장시에서도 거래되었다. 당시 수공업 제품이 만들어졌던 곳이나 판매하던 곳에 지금까지 제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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