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3. 도로와 수로를 이용한 상품 유통
  • 물자 유통을 위한 전국의 도로망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상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도로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서울만 해도 제일 큰 길이 광화문 앞의 육조 거리였으며, 도성 안을 가로지르는 종로길이 그 다음으로 넓은 길이었다. 물론 포장되어 있지 않아 비가 오면 진흙길이 되어 질퍽질퍽하였다. 이러한 도로가 대한제국 때에 와서 고종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도시 계획이 이루어져 넓이 17m의 포장 도로로 다시 태어났다.86)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이 정도였으니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상태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 정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할 수 있는 큰 도로망을 개설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 도로가 모두 9개 노선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10개 노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도로는 오늘날 ‘27번 국도’ ‘35번 국도’ 등과 같이 각 도로를 제1로에서 제10로까지 번호를 부여하였다. 이들 도로망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의 도로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라 조선 후기 제1로에서 제9로까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87)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4, 여지고(與地考)20, 도리(道里).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전국의 도로망을 크게 10대로(大路)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즉 1대로(서북 의주까지), 2대로(동북 경흥까지), 3대로(동남 평해까지), 4대로(동남 동래까지), 5대로(동남 봉화까지), 6대로(서 강화까지), 7대로(남 수원까지), 8대로(남 남해까지), 9대로(서남 충청수영까지), 10대로(남 통영까지). 그런데 도로망의 자세함은 『대동지지』가 단연 뛰어난다.

확대보기
조선 후기 전국 간선 도로망
조선 후기 전국 간선 도로망
팝업창 닫기

제1로는 서북쪽 방향으로 돈의문(서대문)을 빠져나와 홍제천을 거쳐 의주(義州)를 연결하는 도로이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의 사신과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주로 왕래하는 길이기 때문에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 부르기도 한다. 이 도로는 전근대 동아시아 외교 질서의 관점에서 보건대 가장 강대국이었던 중국과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도로의 정비도 잘되어 있었으며, 중간 중간에 사신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숙식 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 돈의문-홍제원-고양-파주-장단-개성-금천-평산-차령-금교-서흥-일수-봉산-동선령-사인암-황주-구현-중화-대동강-평양-순안-숙천-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주-의주로 이르는 길목이다. 남과 북이 연결되면 지금이라도 이 길을 따라 의주까지 직항할 수 있는 길이다.

제2로는 한반도의 동북쪽 방향으로 흥인지문(동대문)을 빠져나와 수유리 고개를 넘어 함경북도 서수라(西水羅)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관북로(關北路)라고도 불렀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다락원(樓院)-만세교-김화-금성-회양-철령-안변-원산-문천-고원-영흥-정평-함흥-북청-이성(利城)-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경성-부령-무산-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서수라이다. 오늘날은 남북이 분단되어 갈 수 없는 길이다.

제3로는 한양 흥인지문을 나가서 중량포 (中梁浦)를 지나 양주(楊州) 망우리(忘憂里)를 거쳐 동해안 평해(平海)까지 연결된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성-망우리-평구역-양근-지평-원주-안흥역-방림역-진부역-횡계역-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이다. 오늘날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려면 국도나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조선시대의 제3로와 비교해 보면 지평까지는 국도와 일치하고, 원주부터는 고속도로와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제4로는 한반도의 동남 방향으로 한양 숭례문(남대문)을 나가서 한강을 지나 경기도 광주(廣州)와 판교(板橋)를 거쳐 부산까지 연결되는 도로이다. 주요 연결 노선은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낙원역(洛原驛)-낙동진(洛東津)-대구-청도-밀양-황산역-양산-동래-부산이다.

제5로는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로서 숭례문을 지나서 유곡역까지는 제4로를 따라 가다가 유곡에서 갈라져 함창(咸昌)을 거쳐 통영(統營)까지 연결된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함창-상주-비천-성주-현풍-상포진(上浦津)-칠원-함안-진해-고성-통영이다.

제6로는 남쪽 방향으로 숭례문을 나서서 동작진 혹은 노량진을 거쳐 미륵당을 경유하여 통영까지 연결된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동작나루-과천-미륵당-유천(柳川)-청호역(菁好驛, 수원)-진위-성환역(成歡驛)-천안-차령-공주-노성-은진-여산-삼례-전주-오수역(獒樹驛)-남원-운봉-함양-진주-사천-고성-통영이다. 만일 한강에서 노량진을 지날 경우에는 금천을 지나 미륵당에서 합류한다.

제7로는 숭례문을 지나 제6로를 따라 삼례(參禮)까지 가서 길을 바꾸어 금구(金溝)를 경유하여 관두량(館頭梁)에서 해로로 제주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따라서 뱃길을 같이 이용하게 된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제6로-삼례역-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관두량-바닷길 (海路)-제주이다.

제8로는 서남 방향으로 숭례문을 지나 제6로를 따라 소사(素沙)까지 가서 길을 바꾸어 평택(平澤)을 경유하여 보령(保寧)의 충청 수영(忠淸水營)까지 가는 도로이다. 주요 연결 노정은 한양-제6로-소사-평택-요로원(要路院)-곡교천(曲橋川)-신창-신례원(新禮院)-충청 수영이다.

제9로는 서쪽으로 향하는 길로서 돈의문을 지나 양화도를 경유하여 통진(通津)에 이르러 수로로 강화까지 연결된다. 주요 노정은 한양-양화도-양천-김포-통진-강화이다. 오늘날 강화도로 가는 길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의 주요 도로망은 대체로 오늘날의 주요 도로망과 유사하다. 현대에는 굴을 뚫고, 산을 깎아 인위적으로 빠른 직선 도로를 개설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구릉과 지형을 따라 도로를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옛길과 오늘날의 도로망이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비록 조선시대가 전근대 사회였지만 자연적인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도로망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