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3. 도로와 수로를 이용한 상품 유통
  • 물길은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이상배

상품 유통에서 도로가 지닌 한계점을 보완한 것이 바로 수로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지역과 지역 간의 상품 유통에서 그 수단으로 많이 이용된 것은 수로의 배를 통한 운송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한강을 비롯하여 낙동강·금강·대동강·영산강 등 많은 물줄기가 있다. 이들 수로는 도로에 비하여 운송 시간을 단축하여 물류를 이동할 수 있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상품을 운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도 종종 이용하였다. 나아가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과 내륙에서 생산되는 상품이 이들 수로를 통해 활발하게 유통됨으로써 국가 경제는 더욱 활기를 띨 수 있었다.

한강은 한양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충청도를 모두 연결하고 있으며, 대동강 주변에서는 평양에 거주하는 객주들이 막대한 물화를 교역하였다. 또한 낙동강 연안에는 약 10리마다 나루터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객주들이 활발하게 활약하였으며, 이들을 특별히 도박 객주(到迫客主)라 불렀다. 그리고 군산항을 통하여 내륙으로 들어간 금강 일대의 최대 중심지인 강경은 평양·대구와 아울러 조선의 3대 시장을 이룰 정도로 활발한 물류 유통이 이루어졌다. 영산강 상류의 나주·남평 등에서 영산포를 거쳐 목포항에 이르는 수로에서는 나주의 객주들이 상품을 광범위하게 유통시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산물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전라도와 충청도 내륙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대규모로 교환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편 바닷길을 통해서도 물품이 운송되었다. 동해안은 바다 수심이 깊어 함경도와 강원도 영동 지역, 그리고 경상도 지역을 연결하는 해안가를 따라 물류가 이동되었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남해안과 서해안을 경유하여 한양으로 왔다.

이제 수도 한양과 연계되는 한강을 중심으로 국가의 수로 관리와 운영, 배의 종류와 규모, 상품을 원활하게 운송하기 위한 나루와 상품 보관을 위한 창고의 설치, 수로를 통해 운송된 상품의 종류 등을 살펴보자.

조선 정부는 수로를 통해 좀 더 안전한 물류 운송을 위해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수로를 통해 운송되는 물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세곡이었기 때문에 안전성 확보가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특히 세곡의 운송 과정에서 선박이 좌초되는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하자 이를 관리하기 위한 사람을 임명하였다.

바다에서 세곡을 운송할 때는 각 관리마다 담당 업무를 분장하여 주었다. 전라도에서 백성들에게 거둔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해 오는 과정에 대하여 대신들이 의논하는 기록에 의하면 해운 판관(海運判官)은 배의 손질과 세곡을 운송할 군사를 점검하고, 관찰사는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세곡을 배에 나누어 싣고, 수군 절도사는 세곡을 배에 싣는 과정을 감독하고, 우후(虞侯)는 세곡을 실은 배를 충청도까지 호송하고, 압령 만호(押領萬戶)는 조를 짜서 직접 뱃길을 지휘하여 인솔하였다.97) 『성종실록』 권216, 성종 19년 5월 임진. 이러한 업무 분담은 만일의 사고에 대하여 그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확대보기
자도성지삼강도(自都城至三江圖)
자도성지삼강도(自都城至三江圖)
팝업창 닫기

강을 통한 물류 운송도 마찬가지이다. 정부에서는 1395년(태조 4) 서울 용산에서 충주 금천(金遷)까지 한강 줄기 연안 7곳에 수로 전운소(水路轉運所)를 설치하고 완호 별감(完護別監)을 파견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선박 15척과 뱃사공 30호를 예속시켜 세곡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98) 『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정월 병오. 이들 수로 전운소는 1414년(태종 14) 수참(水站)으로 명칭이 바뀌고 책임자도 수참 전운 별감(水站轉運別監)이라고 불렀다.99)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12월 병진. 당시에 설치된 일곱 곳의 수참은 충주의 금천, 여주의 여강(驪江), 천령(川寧)의 이포(梨浦), 양근(楊根)의 사포(蛇浦), 광주의 광진(廣津), 그리고 한강도(漢江渡)와 용산진(龍山津)이었다. 한양의 한강나루와 용산나루 그리고 광나루 세 곳을 제외하면 남한강 유역에 네 곳의 수참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내륙에서 육로를 통해 모은 세곡을 선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자신의 관리 구역에서 세곡선이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협조하고, 강가에 쌓이는 퇴적물을 제거하여 순조롭게 수운할 수 있도록 환경을 관리 감독하였다.

수참은 1390년(공양왕 2) 정몽주(鄭夢周)의 건의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 다.100) 『증보문헌비고』 권157, 재용고(財用考)4, 조운(漕運). 조선시대의 수참은 담당 지역도 나뉘어 있었다. 한강 하류 지역은 우수참(右水站)에서, 한강 상류의 남한강과 북한강은 좌수참(左水站)에서 담당하였다. 수참에는 20명의 수부(水夫)가 배치되어 10명씩 교대로 근무하다가 태종 때 30명으로 늘렸다.101)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1월 갑자. 이들은 수참이 위치한 지역의 강변에 살고 있는 양인(良人)들로 충당되었다. 수부들은 처음에는 수참간(水站干)으로 불렀다. 그러나 점차 비첩(婢妾) 소생들이 소속된 사재감(司宰監) 수군들이 수참간에 충당된 후로는 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천인의 취급을 받았다. 이에 태종 때 과천과 충주 사이의 수참간들이 모여 자신들의 신분을 명확하게 구분해 줄 것을 요구하자 정부는 이들을 수부로 바꾸어 수군과 분리하였다.102)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12월 병진. 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분은 비록 양인이지만 맡은 일은 사회적으로 천인으로 여기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존재가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