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3. 객주의 활동과 외국 상인의 침투
  • 일제의 압박과 객주의 변화
오성

일제는 내지 행상과 대외 무역을 자신들이 주도하고자 일찍부터 객주의 상권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청일 전쟁 이후 일제는 개항장 객주의 중개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내지 행상에 주력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조 직적으로 수행하고자 직접 지원하는 관제(官制) 조직까지 결성하였다.

또한 개항장 객주는 외국 상인보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었다. 외국 상인은 조선 상인보다 우세한 자본력과 불평등 조약 체제에 근거한 유리한 무역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일본 상인은 본국으로부터 금융상의 여러 혜택과 지원을 받은 반면에 조선 상인은 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던 조선 상인은 조세를 상업 자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의 결과 지세(地稅)가 금납화(金納化)되자 상인이 탁지부에 해당 지역의 세금을 미리 납부한 후에 그 지역의 세금을 지급받아 상업 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 의한 자금 조달은 변칙적이고 불안정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개항장 객주를 비롯한 많은 조선 상인이 외국 상인의 자금 선대(先貸)에 얽매여 상거래를 지배당하고 고리대로 파산하였다.158) 이헌창, 앞의 책, 1999, p.249.

외국 상인은 내지 통상을 통해 산지의 상인·생산자와 직접 거래함으로써 국내의 상품 유통 과정을 장악해 나갔다. 188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과 중국인의 내지 통상이 본격화되면서 수출품의 구입과 수입품 판매 면에서 일본인 행상과 중국인 행상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88년부터 일본 상인이 조선인의 범선을 이용하여 개항되지 않은 내지를 항행할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함에 따라, 곡물의 대량 반출이 가능해졌다. 청일 전쟁 이후 내지 통상이 한층 진전됨에 따라 개항장 객주의 경제적 기반은 점점 취약해졌다. 인천과 부산의 객주의 수가 대체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는 증가하다가 그 이후에 감소하였던 것은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159) 이헌창, 앞의 책, pp.249∼250.

러일 전쟁의 승전을 계기로 한국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제는 한국의 ‘재정 정리’와 ‘화폐 정리’를 내세워 재정 체계 및 화폐 제도를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객주를 비롯한 조선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어음도 철폐시켰다. 일제의 어음 폐지로 조선 상인들의 신용 체계는 붕괴되었 고 자금 고갈로 많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통화의 부족과 금융 핍박으로 초래된 전황이 계속되면서 조선 상인의 피해는 더욱 증가하였다.160) 유승렬, 앞의 책,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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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 상권을 재편하고 일인 회사들이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객주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어 갔다. 일제는 포구 중심의 상업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일찍부터 교통·운수망을 침탈하기 시작하였고, 개항장과 일본 간의 해운을 독점하고 나아가 조선의 내륙과 포구 간의 운수도 독점하기 위한 시도를 벌였다. 일제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항행권을 강압적으로 탈취하였다. 이는 포구의 객주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으며, 각 연안이나 포구의 객주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161) 유승렬, 앞의 책, p.286.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객주는 상업을 근대화하고 자본을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국권과 상권을 수호하기 위한 움직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채 보상 운동, 재난 동포 구원 운동, 근대 기업 설립 및 식산흥업 운동 등을 직접 전개하거나 적극 찬조하며 후원하였다. 또한 객주는 나라의 경제를 발달시키려면 상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인식에서 상업자 교육에 큰 관심을 두고 상업 학교 및 일반 학교를 중심으로 한 근대 교육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방식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직접 운영을 담당하거나 수입 일부를 학교에 지속적으로 기부함으로써 학교 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는 형태 등이었다.162) 유승렬, 앞의 책, p.287.

이 밖에도 객주는 빈민 구제나 사회사업 등 각종 사회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각종 학회 활동도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 객주 중에는 직접 민족 운동에 참가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객주가 벌인 여러 근대화 운동은 일제의 압박과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객주의 수도 점차 감소하였다. 서울의 객주 수를 보면, 한말에 200∼300여 명, 1914년경에 90여 명, 1910년대 후반에 51명 등으로 일제 강점 이후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지방 내륙 지역에서 객주가 비교적 다수 유지될 수 있었던 곳은 평양, 대구, 강경, 함흥 등 전통적으로 조선 상인의 세력이 강하였던 지역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 객주의 세력도 현저히 위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로 해산물을 취급하던 객주와 미곡을 취급하던 일부 객주가 이어지는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163) 유승렬, 앞의 책, pp.28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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