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4. 대외 무역의 전개와 국내 산업의 변화
  • 수출입 상품
  • 수출 상품
오성

조선이 수출하던 상품은 대부분 곡물류 등 농산물이었다. 특히 미곡과 콩의 비중이 컸다. 풍흉에 따른 산출량의 불안정성과 운송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곡과 콩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갑오개혁 이후 현물 납입 제도 대신 조세의 금납화가 전면적으로 실시되자 이전까지 조세미였던 막대한 양의 미곡이 수출 상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곡물의 수출 증가는 전반적으로 지주제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출 곡물의 상당 부분을 소작미가 차지하게 되자 지주들은 지대 수취를 확대하고자 소작료를 인상하는가 하면 미곡의 상품화 과정을 직접 장악하였다.173) 하원호, 앞의 책, p.32.

일본인들도 조선인 대리인을 통하여 수확의 반을 넘긴다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한 다음 수확한 후에 미곡을 거두어 개항장으로 보냈다. 일본인들이 대여하는 금액은 항상 시장가보다 낮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누렸지만, 농민들에게는 애써 생산한 미곡에서 나오 는 이윤이 별반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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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의 미곡 수출
군산항의 미곡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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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은 거의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콩은 기후 조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일본에서 수요도 계속 늘어나 수출량이 증대되었다. 예전부터 콩의 수요가 많았던 일본은 자국의 생산량도 상당하였지만 조선산 콩의 품질과 가격이 적정하였던 까닭에 콩의 공급을 조선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콩을 재배하던 곳이 뽕밭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나타났고, 콩 생산량이 감소하게 되었다. 반면 조선은 콩의 수출을 통한 이윤 증대로 말미암아 점차 콩 재배 면적이 확장되는 추세였다.174) 하원호, 앞의 책, p.124.

한편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면서 국내의 곡물 가격이 크게 올랐다. 곡물가의 앙등은 하루 벌어 하루 식량을 구입해야 조선의 빈농이나 영세민에게는 생계 자체가 위협받는 큰 타격이었다. 특히 흉년이 들면 더욱 사태가 심각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지방별로 곡물의 반출을 막고 곡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100건 이상의 방곡령이 발효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방관의 방곡령 실시는 조일 통상 장정을 내세운 일본 측의 항의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금과 은은 조선의 수출품 중에서 곡물류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통계에 오르는 금 수출액은 상인들의 자진 신고에 불과 한 정도였다. 또한 순금은 무관세 수출이 허용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피가 작아 신고하지 않고도 쉽게 수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은 조선의 금은을 대량으로 유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 상인보다 청나라 상인이 금을 많이 유출하였다. 청나라 상인들은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금을 수입해 갔다. 해로의 경우에는 서해안 지역에서 밀무역을 하던 정크선으로 금을 밀수하였다. 또한 청나라 상인들은 수입 상품의 판매 대금으로 받은 엽전을 주로 사금이나 은화 등으로 바꾸어 갔다.

반면 일본 상인들은 수입 상품의 판매 대금을 주로 곡물 매입에 투입하였던 까닭에 초기에는 청나라 상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을 유출하는 양이 적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금본위제를 채택한 이후에는 금 흡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관계로 조선의 금 수출 시장을 장악하려 하였다. 특히 일제는 조선에 진출해 있던 일본 제일은행을 통하여 금을 대량으로 매입 유출함으로써 자국 금본위제(金本位制) 확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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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일은행권
일본 제일은행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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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금 수출액은 계속 증가하였고, 전체 수출액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히 높았다. 특히 금은 세관의 통계에 잡히지 않은 양이 상당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실제 이루어졌던 금과 은의 수출액은 통계 수치보다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 이래 중요한 수출품의 하나는 인삼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약 70∼80년간 인삼은 대일 무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인삼과 중국산 생사, 비단 무역을 통해 조선 상인들이 얻은 이윤도 막대한 것이었으며, 일본 은 자국 은의 유출을 막으려는 조치로 인삼의 인공 재배를 시도하고 양잠 기술 개발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할 정도였다.175) 오성, 『조선 후기 상업사 연구』, 한국연구원, 2000.

자연삼 산삼이 절종되면서 인삼의 재배와 홍삼으로의 가공이 이루어지자 대청 홍삼 무역이 번성하였다. 공식적인 포삼 무역 이외에도 방대한 양의 인삼 밀무역이 청나라와 이루어졌으며,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루트도 다양하였다.176) 이철성, 『조선 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한편 개항이 되자 개항장을 통한 백삼의 수출이 허용되었다. 또한 1882년 청나라와의 조약 체결로 홍삼 수출이 종전대로 허용되었지만, 이는 여전히 국경을 통해 육로로 수출하는 조선 상인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해로를 통한 홍삼의 수출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출 허가를 받은 상인들은 15%의 종가세를 지불하게 되었다. 1895년 가을에는 해로를 통한 홍삼 수출도 허용되었다. 이 무렵부터 가공된 인삼의 수출은 제물포로 집중되었고 청나라 상인들이 주된 인삼 무역업자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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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제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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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어 홍삼 전매권이 일본에 넘어간 이후에는 인삼 재배업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져 일본인들이 인삼 재배 농장주에게 보조금을 대여하여 미리 수확물을 매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도 하였다.177) 러시아 대장성, 김병린 옮김,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유풍출판사, 1985.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에도 인삼의 주요 산지인 개성 지역의 상인들은 인삼 무역권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이 인삼 무역을 통해 획득한 영업 이익도 상당한 것이었다.

이 밖에 조선이 수출하던 상품은 대부분 농산물, 멸치 등을 비롯한 해산물, 광산품 등의 1차 상품이었다. 1차 상품 중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쇠가죽이었다. 군화의 원료였던 쇠가죽은 일본의 군수 공업상의 필요에 따라 개항 초기부터 수출이 불어났다. 그러나 1895년부터 1897년경에 가서는 조선산 소가 주로 운송에 이용되었던 관계로 가죽의 질이 저급하다 하여 수출량이 급속히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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