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1. 일제 강점기 시장의 변화
  • 교통 운송 체계의 변화와 시장
김세민

개항 이후 시장에서는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농산물 등을 수출하기 위한 시장이 성장하였고, 섬유 제품 등의 수입은 가내 수공업을 해체시키면서 시장을 확대시켰다. 기선 항로와 철도망의 확대, 근대적 금융·통신 제도의 도입은 시장의 양적 성장과 질적 심화를 낳았다. 더욱이 갑오개혁 때에 조세의 전면적인 금납화(金納化)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유통 질서와 유통 체계가 만들어졌다. 정부에서 사용할 물자를 현물로 징수하거나 공인(貢人)을 통해 조달하는 방식을 폐지하고, 관청이 직접 시장에서 조달하게 되자 전통적인 조세 수납 경로가 사라지고 새로운 유통 체계가 필요해진 것이다.

국제 무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국경 무역과 왜관(倭館) 무역이 없어졌고, 무역 상대국이 중국·일본뿐만 아니라 영국·미국·러시아 등지로 확대되었다. 또한 시장이 외국인에게 개방되면서 중국, 일본 등의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어 상권을 잠식하고 있었다. 교역품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에 주로 수출하던 쌀과 콩 외에도 철광석과 면화가 새로운 수출 품목으로 대두하였다. 수입 품목에서도 목재, 술, 석탄, 석유, 종이 등의 비중이 증대되고 철도와 광업 투자를 위한 설비가 활발히 수입되었다. 특히 수입품은 우리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값싼 중국의 삼베(麻布)가 대량 수입되어 유통되었으며, 비싸고 공급량이 적어 상류 사회에서만 소비되던 꿀은 설탕으로 대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석유가 수입되면서 개항장이나 개시장(開市場), 혹은 그 부근의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등유(燈油)도 석유로 대체되어 갔다.18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상공업사』, 2003, pp.370∼381.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들이 시장에 꽉 찼다.”라고 할 정도로 외국산 수입품이 늘어나면서 시장에서 취급하는 물건과 품목이 다양해졌다. 소비자들은 물품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효과를 보았으나, 그 배후에는 조선 상인의 위축과 자본 유출이라는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새로이 형성된 개항장이나 개시장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조선 상인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서울의 시장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새로운 시장 흐름에 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시장과 상권의 재편으로 나타났다. 남대문 밖에 있던 칠패(七牌) 시장이 남대문 안으로 옮겨져 남대문 시장으로 재편되고, 이현(梨峴) 시장이 동대문 시장으로 거듭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무엇보다 시장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해운 항로와 철도망의 확대, 근대적 금융과 통신 제도의 도입이었다. 러일 전쟁 이후 식민지화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교통, 통신, 금융 시장의 확충은 서울의 상업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철도망은 서울 시장의 물화 흡수와 배급력을 현저히 강화시켰다. 1900년 완공된 경인 철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경인 철도가 완공되기 이전에는 인천과 용산을 오가는 수운 및 육운의 운임이 인천과 오사카를 오가는 운임의 두 배 가까이 되었으나, 경인 철도가 수운 운송을 대체하면 서 서울과 인천의 교통 편의를 한층 증진시켰다. 화물의 신속한 운송이 가능하였을 뿐 아니라 결빙기 동안에도 운송에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얼음이 얼기 전에 미리 물품을 구입해야 하는 불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인 철도는 서울과 인천 사이의 수운을 급속히 대체해 갔다. 경인 철도 개통 이전에는 한강 수운이 매우 번창하여 소기선(小汽船)의 왕래가 빈번하였지만, 1911년경에는 인천 추전상회(秋田商會) 소속의 소기선만이 거의 정기적으로 왕복하거나 일본 범선과 조선 목선이 왕래하는 데에 불과하였다.188)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385∼386.

확대보기
경인선 기관차
경인선 기관차
팝업창 닫기

1905년과 1906년에 각각 완공된 경부 철도와 경의 철도는 서울 시장의 배급력을 더욱 크게 강화시켰다. 철도의 부설과 개량은 정비된 도로망과 항만에 연결되면서 수송력을 배가하였다. 경부 철도는 개통되자마자 관부 연락선(關釜聯絡船)을 통하여 일본의 주요 철도와 이어졌다. 경부 철도와 경의 철도가 동일한 운임률로 일반 영업을 개시한 1908년부터는 일본 철도의 모든 노선과 연결되어 연락 운수를 실시하였다.189) 정재정, 『일제의 조선 철도 침략과 한국인의 대응(1892∼1945)』,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pp.260∼262, p.270. 그리하여 그동안 수출입의 주 무대가 되었던 인천 무역이 1908년 이후 격감하고 서울 무역이 급격 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철도 연대 수송과 장거리 운임 체감법 때문이었다. 곧 철도 요금의 장거리 체감법 실시, 운송 위험 부담의 감소, 신속한 운송에 따른 자금 회전의 원활화 등은 철도 운송의 커다란 매력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철도 운송은 서울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급증시키고 조선인 구매력을 향상시켜 서울의 수입 시장을 크게 확대시켰다. 철도 연대 수송에 힘입어 1909년부터는 서울 상인과 오사카 상인 사이에 직거래가 시작되어 일본과 조선의 무역을 더욱 확대시켰다.

확대보기
경부선 개통식
경부선 개통식
팝업창 닫기

아울러 철도 운송은 국내 물자의 운송 체계를 재편하면서 서울 시장으로 물화가 집중되도록 하였다. 특히 1908년 철도 요금이 변경되면서 장거리 운송비가 절감됨에 따라 상인들의 철도 이용이 크게 늘었다. 그리하여 1907∼1908년경부터 한강 수운을 잠식하면서 성장한 철도 운송이 1911년에는 수운을 앞지르게 되었다. 경상도의 미곡이 다량으로 서울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도 철도 운송 덕분이었다. 경상도의 목면과 삼베를 비롯하여 각지의 비단이 철도에 의해 신속하고 저렴하게 서울로 몰려들었다. 배를 통해 인천을 거쳐 들어오던 모시는 대전과 군산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를 통해 유입되었다. 육로로 서울에 들어오던 명태는 개항 이후에는 기선으로 운송되다가 경부 철도가 개통되자 배로 부산으로 갔다가 철도로 서울에 운송되었다.

철도의 부설은 지방의 장시와 도시의 상권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충청북도는 개항 직후까지 군·면 단위의 5일장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들 소시장권은 충주의 대시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충주의 대시장권은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여 서울과 인천의 개항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즉 충주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산은 소시장권을 거쳐 충주 대시장권에 집산되어 서울과 인천으로 운송, 거래되었다. 반대로 수입품을 포함한 이입품(移入品)은 인천이나 서울의 한강에서 수운으로 충주로 운송되고 다시 소시장권으로 분산되었다. 그런데 경부 철도가 대전-조치원-천안으로 연결되면서 청주가 충청북도 제일의 화물 집산지로 바뀌게 되었고, 시장권도 충주의 상권을 압도하게 되었다.190) 이헌창, 『개항기 시장 구조와 그 변화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몬, 1990, pp.157∼200. 철도를 통해 물품을 각 소비지로 직송할 수 있게 되자 상권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19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386∼388.

이처럼 갑오개혁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유통 질서와 유통 체계, 개항 이후에 활발해진 근대적 국제 무역의 성장, 그리고 러일 전쟁 이후에 이루어진 철도망의 형성은 시장의 주도적 지위를 확립시킨 3대 계기라 할 수 있다.192) 이헌창, 『한국경제통사』, 법문사, 1999, pp.245∼246.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