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1. 일제 강점기 시장의 변화
  • 외래 상품의 유입과 거래
김세민

개항 이후 다양한 외국산 수입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쌀인 안남미(安南米)가 수입되어 시중에서 판매되는가 하면 포도주, 맥주, 양주, 커피 등 외국산 기호품이 시판되었다. 특히 커피는 왕실과 상류층에서 많이 찾는 기호품이었다. 고종도 커피를 즐겼는데, 이때의 커피는 모난 설탕 덩이 속에 커피 가루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1898년(광무 2) 9월에는 김홍륙(金鴻陸, ?∼1898)이 커피에 아편을 넣어 고종과 태자를 상하게 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202) 『고종실록』 권38, 고종 35년 9월 12일.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있을 때에 식사 시중을 하던 손탁(孫澤, Sontag.A, 1854∼1925) 여사에게 호텔을 지어 주었다.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 생겨 커피를 팔게 되었다. 또 3·1 운동 이후에 일본인이 지금의 명동에 ‘멕시코’라는 다방을 내었다. 1910년경 세종로에 나무 시장을 벌인 한 프랑스인은 보온병에 넣어둔 커피를 나무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 장터에 짐을 풀게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자전거도 판매되었다. 사람의 힘에 따라 스스로 굴러 간다고 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자행거(自行車)’라고도 불렀다. 자전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미국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1900년 무렵의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는 자전거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많은데, 언더우드(Underwood) 목사 소유의 자전거를 판다는 광고도 있다.203)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년 4월 27일자.

1905년 12월에 제정되어 실시한 가로 관리 규칙(街路管理規則)에 “야간 에 등화 없이 자전거 타는 것을 금한다.”라는 조항이 있어 자전거가 상당히 보급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자전거는 상류층 일부에서 이용하였으며, 의친왕 이강(義親王李堈, 1877∼1955)도 자전거를 잘 탄 것으로 유명하였다.204) 황현(黃玹), 김준 옮김, 『완역 매천야록(完譯梅泉野錄)』, 교문사, 1994, p.659.

이 무렵 많은 상금이 걸린 자전거 경기 대회도 자주 열렸다. 제1회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지금의 을지로 6가 서울 운동장 서쪽)에서 열렸는데, 조선인과 외국인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 여기에서는 육군 참위(參尉) 권원식(權元植)과 일본인 요시가와(吉川)가 결승을 다투었으며, 상금은 100원(圓)이었다.205) 『황성신문』 1906년 4월 16일자.

1920년대에 엄복동(嚴福童, 1892∼1951)은 자전거 잘 타기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일본인들도 참가한 자전거 경기 대회에서 거의 언제나 1등을 차지하여, “하늘에는 안창남(安昌男), 땅에는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이다.

1920년 5월 2일 경복궁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에서 엄복동은 마지막 40바퀴를 다 돌았지만, 경쟁자였던 일본인은 몇 바퀴를 남겼을 때 주최 측이 돌연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에 분개한 엄복동이 본부석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찢어 버리자 일본인들이 달려들어 그를 구타하였다. 이것을 본 관중이 들고일어나 큰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사태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남녀노소가 즐겨 피우던 담배도 여러 종류가 판매되고 있었다. 담배는 조선 후기 이래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세기 조선에 왔던 하멜(Hamel. H)의 표류기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이 4∼5세 때 이미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 정도였다. 이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도 역시 어린아이들의 흡연이었으며, 이에 경무청에서는 아이들의 흡연을 금하는 훈칙을 시달할 정도였다. 개항 이후 외국산 궐련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붐이 일어난 연초 제조업은 1910년대에는 조선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고 규모가 큰 제조업이었다. 신문 에도 담배 광고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궐련초는 여성용 담배로 선전하여 담뱃갑이나 광고에도 여성이 등장하였다. 담배 소비는 계속 늘어나 1929년 경기도 양주군은 ‘연기로 피워 버리는’ 담배의 한 달 소비 금액이 2만 원이 넘었는데, 이것은 농민 4,000명의 한 달 식량에 해당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206) 『동아일보』 1929년 7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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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궐련초
국화와 궐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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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새롭게 선보인 서구식 상품들이 일제 강점 이후 더욱 보편화되면서 시장의 거래 품목 또한 한층 더 다양화되었다. 일본인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오뎅, 초밥, 소바, 왜간장 등 일본 음식과 재료가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하였고, 간식으로 떡과 빵, 사탕, 카스테라 등도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김은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해초(海草)로 1926년부터 7년 동안 30배가 증가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고, ‘간스메(かんづめ)’라고 부르는 통조림도 판매되었다.

옷감은 여전히 시장 판매 품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종로 상가의 대부호였던 김희준(金熙俊), 최남(崔楠) 등도 주로 포목(布木)을 취급하고 있었다. 일본인 상점 중에도 오복점(吳服店)이 많았던 것을 보면 시장에서 옷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주목되는 변화는 여성들이 서양식 복장인 양장을 입기 시작하였고, 남성들 역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복장에 어울리는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 블라우스, 치마 등이 판매되었으며, 속옷에도 변화가 나타나 메리야스와 내복, 사루마다(さるまた) 등이 판매되었다. 옷을 만드는 재봉틀이 시장에서 고가로 팔리고 있었으며, 재봉틀만을 전문으로 훔치는 도둑이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신발에도 운동화, 고무신 등이 등장하였으며, 일본인들이 신는 게다(げた)도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구두를 전문으로 파는 양화점도 나타났다. 이를 닦는 데 사용하는 치약과 칫솔, 세탁비누, 타월 등도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세탁용 양잿물 또한 중요한 생활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치약의 주 고객은 흡연으로 이가 누렇게 변한 남성이었다.

여성들의 화장용품으로 분과 크림, 연지, 로션, 동백기름, 향수 등도 판매되었는데, 분은 특히 ‘박가분(朴家粉)’이 유명하였다. 박가분은 1916년에 박승직(朴承稷, 1864∼1950)이 만든 화장품의 이름으로 우리나라 화장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박가분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 화장품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거나 중국 무역상들이 몰래 갖고 들어온 것이었다. 박가분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가정집 아낙네를 비롯하여 기생 등 화류계 여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당시 여성 사회를 휩쓸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납 중독 사건을 일으켜 인체 유해론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1937년에 자진 폐업하였다. 그 뒤를 이어 납을 넣지 않은 백분임을 강조하고 나타난 것이 바로 서가장분(徐家張粉)과 서울장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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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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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감으로는 기존의 장작이나 숯 이외에 새로이 연탄이 등장하여 가정에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난방 기구로는 난로가 등장하여 판매되었는데, 겨울철 학교와 사무실 등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겨울철이 되면 난방 재료인 장작, 숯, 잎나무, 무연탄의 시세는 주요한 기삿거리가 되곤 하였다. “차차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겨우살이 걱정도 함께 깊어 가는”207) 『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자. 것이 일반 서민들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가정에 전기가 보급되면서 전구 등을 판매하는 전기 기구상도 나타났다. 불을 붙이는 성냥 또한 널리 보급되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성냥을 가지 고 놀다가 화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성냥갑을 활용하여 잉크 물을 빼는 생활의 지혜까지 소개하기도 하였다. 펜으로 글씨를 쓰다가 손에 잉크가 묻으면 물에 씻어도 잘 빠지지 않는데, 성냥갑에 있는 황을 물에 적시어 잉크 묻은 곳을 문지른 다음 물에 씻으면 깨끗이 빠진다는 것이다.208) 『동아일보』 1937년 8월 29일자.

문구류로는 붓과 먹 이외에 새롭게 잉크를 넣어 쓰는 만년필이 등장하여 각광을 받았다. 만년필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며칠 쓰지도 못할 만년필을 벌려 놓고 제비를 뽑아서 파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대개 제비 속에다 여러 가지 암호를 넣어 상은 타지 못하게 하고 만년필만 팔아먹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속는 자가 많았다.209) 『동아일보』 1923년 5월 12일자. 그 밖에 잉크, 펜, 연필, 고무지우개, 필통 등도 새로이 나타나 판매되었다.21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시장』, 2007, pp.15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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