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2. 민족 상인들의 상권 수호 노력
  • 조선의 상권을 독차지한 진고개
김세민

외국 상인과 민족 상인 간의 상권 경쟁은 이미 개항과 함께 불붙기 시작하였다. 특히 외국 상인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고 전국의 물화가 모여드는 최대의 소비 시장인 서울 시장에 진출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1885년(고종 22) 수표교에서 남대문 사이는 청국 상점이 300여 호에 달하였으며, 남산과 진고개 일대는 일본 상점이 판을 쳤다.

1929년 『별건곤』에 실린 ‘진고개, 서울맛·서울 정조(情調)’라는 기사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진고개 일대의 일본인 상점이 조선의 고혈을 짜낸다고 하며 개탄하고 있다. 종로 거리의 조선인 상가가 “휑뎅그렁하여 빈 듯하며 어둠침침한” 것에 비하면 일본인 상점은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하며 풍성하여” 마치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마저 들을 정도였던 것이다.

본래 진고개는 조선시대에는 남산골이라 불리며 초헌(軺軒)이 오가고 옥교(玉轎)나 보교(步轎)가 들락거리며 사령 군령들의 긴 대답 소리와 양반들의 호령 소리가 뒤섞여 나오던 곳이었다. 그러나 강점 이후에 혼마치(本 町)로 이름이 바뀌고, 솟을대문과 줄행랑은 이층집 삼층집으로 변하였으며, 청사초롱은 천백 촉의 전등으로 바뀌어 그야말로 일본인 상점이 즐비한 불야성(不夜城)의 별천지로 탈바꿈하였다. 일본인의 거리는 점점 뻗어나가 지금의 충무로·명동·남대문로·을지로 일대는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마치 서울 속의 작은 도쿄와도 같았다.

확대보기
진고개 전경
진고개 전경
팝업창 닫기

일제 강점기 진고개는 조선의 상권을 독차지하였다. 6층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미나카이(三中井)의 대상점, 조선인 고객을 가장 많이 끌어들이는 히라다(平田) 백화점, 대자본을 가지고 조선 상업계를 풍비박산낸 미쓰코시 오복점(三越吳服店)을 비롯하여 좌우로 총총히 들어선 일본인의 상점은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하며 풍성한 품이 실로 조선 사람들이 몇 백 년을 두고 만들었다는 북촌(北村) 일대에 비하여 얼마나 장한지 견줄 바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선은행 앞에서부터 경성 우편국(京城郵便局)을 옆에 끼고 진고개를 들여다 보고 가면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 선 상점은 어느 곳을 막 론하고 활기가 있고 풍성하며 진열장마다 모두 값진 물건과 찬란한 물품이 사람의 눈을 현혹하며 발길을 끌었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철 밤이나 사람을 녹일 듯한 여름밤에 이곳에 들어서면 온갖 꽃장식이며 서늘한 맛이 떠도는 온갖 장치가 천만 촉의 휘황한 전등불과 함께 불야성을 이루어 마치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한 번 가고 두 번 가는 동안에 어느덧 진고개의 찬연한 광경에 홀리게 되니, 휑뎅그렁하여 빈 듯하며 어둠침침한 종로 네거리 조선 상점부터 북촌 일대에 비하면 모든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광경에 정신까지도 전부 거기에 빼앗기고 말 지경이었다.

확대보기
종로 상가
종로 상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번화가
번화가
팝업창 닫기

그리고 한 번 일본 상점에 들어서면 사람의 간장까지 녹여 없앨 듯한 친절하고 정다운 일본인 점원의 태도에 다시 마음과 정신이 끌리게 되니, 한 번 이와 같은 유혹의 단맛을 맛본 후에는 한 푼 두 푼 일본인들에게 옮겨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조선 사람들의 발이 잦아지고 수효가 느는 만큼 종로의 조선 상점은 파산이 늘어나고 살림은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고개의 독특한 유혹에 가는 이는 모두 조선 사람이요, 돈을 쓰는 이 또한 거의 조선 사람이니, 이 진고개의 유혹이 얼마나 ‘조선 사람의 피를 빨아 가며 조선의 고혈을 착취’하는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캄캄하고 적적하고 무취미하던 시골에서 온 조선 사람들에게 한 번 이곳을 구경하는 것은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서울 구경을 왔다 간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진고개의 자태와 용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서울 구경 온 이의 3분의 2 이상은 진고개를 보고자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기를 구경하고 이곳에 홀린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평생소원이 “진고개 가서 그 좋은 물건이나 맛난 것을 사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어이 서울에 다시 와서 바로 진고개로 가서는 무슨 물건이든지 사고야 마는 것이다. 조선 상점에도 있는 물건을 진고개서 사야만 서울 구경을 한 보람이 있고 자랑거리가 되며, 시골 사람의 독특한 우월감이 생겼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그만 넋을 잃고는 한 가지라도 사고자 했던 것이다.211) 정수일, 「진고개, 서울맛·서울정조(情調)」,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27일.

확대보기
미쓰코시 백화점 개점 광고
미쓰코시 백화점 개점 광고
팝업창 닫기

진고개 일대의 일본인 상가는 진열된 물건들이 화려하고 풍성하여 서울의 부유한 고객은 진고개의 미쓰코시 백화점 등을 자주 찾았다. “기생들과 여학생들이 제일 많이 가는 모양인데 물건도 똑같고 값도 조선 상점보다 싸지 않은데도 손님들은 크다는 소문에만 찾아가는 것 같다.”고212)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8월 24일자. 할 정도로 당시 진고개의 화려함은 조선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1922년 일본 상점의 손님 가운데 조선인은 8할 정도였으나, 조선 상점의 손님 가운데 일본인은 5푼(分)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213)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자.

혹시 남대문통이나 진고개를 지나 보신 이면 누구나 흔히 눈에 띄는 일이겠지만 정자옥(丁子屋), 평전(平田)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 대성황으로 물품이 매출되니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가 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손님 대접이 친절한 맛에 그렇다거나 값이 특별히 종로에 있는 조선 상점들보다 싸다면 조선 장사 양반들도 좀 생각해 볼 일이고, 같은 값인데 기를 쓰고 그곳으로 몰려간다면 몰려가는 양반들이 한 번 생각해 볼 일이지요, 삼월 오복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 보아요. 그렇다면 배우는 것이 도리어 우환이지요.214) 「엽서통신 : 종로일통행인(鐘路一通行人)」, 『별건곤』 제34호, 1930년 11월호.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