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2. 민족 상인들의 상권 수호 노력
  • 시장 상인들의 폐점·철시 운동
김세민

일제 강점 후 조선의 상업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일제의 정치적·행정적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한 일본 상점은 대자본과 상품 생산 공장을 튼튼한 토대로 삼아 조선의 상권을 장악해 갔다. 이와 반대로 조선 상점은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었으며, 소자본의 영세 상가가 대부분이었다. 일본 상점들은 유리한 토대 위에 조선의 시장과 상권을 잠식해 들어갔다. 하지만, 조선 상인들은 민족적 자부심과 단결을 통해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서울의 상권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북촌 상가와 일본인의 남촌 상가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상권은 거의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북촌의 조선인 상권은 나날이 쇠락하고 있었다. 설을 맞이하는 대목에도 남촌 상가는 푸지고 번화하였지만 북촌 상가는 쓸쓸하고 적적하기만 하였다.215) 『동아일보』 1922년 1월 1일자.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자본에게 중소 자본이 압박을 받고 구축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대자본의 횡포가 나날이 커져 간다. 백화점이란 것도 역시 대자본 횡포의 산물 중 하나이다. 중소 상업의 뒷덜미를 누르고 손님이란 손님의 발길은 모두 끌려고 하는 것이 백화점의 주안점이다. …… 남풍이 시시각각 북으로 북으로 몰려들어 오니 북촌의 상계(商界)란 것은 그림자조차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이다. …… 한심하다. 몰려드는 위세도 커다란 북촌 상계로서 하등의 대책도 없고 그날이 그날인 변통할 길이 없는 형상에서 헤매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 북악과 남산이 에워싸고 있는 경성이 경성 안의 상가를 살피어봄에 이 어찌하면 이렇게도 칼로 베인 것과 같이 현저한 간격이 있을까. 남촌은 산 저자거리로 아무리 불경기 때이라고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세가 역력하다. 그러나 고개를 돌이켜 북촌의 중심인 종로 네마루에서 전후좌우를 보고 또 보아도 활기가 있는 것 하나도 눈에 안 띈다. 오직 저물어 가는 저자거리로만 보일 뿐이다. 이 쓸쓸한 상가를 보고 돌아서는 이의 가슴은 누구나 답답하고 눈이 캄캄하다.216) 「반도 최대의 백화점 출현-동아 백화점의 내용과 외관-, 얼마나 한 자본으로 어떠한 인물들이 경영하는 것인가?」,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년 1월 1일.

확대보기
조선인 점포
조선인 점포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조선인 점포
조선인 점포
팝업창 닫기

이처럼 조선인의 북촌 상가와 일본인의 남촌 상가는 칼로 자른 것처럼 현저한 간격이 있었으며, 북촌의 종로 거리는 활기가 없이 쓸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들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으며 꿋꿋하게 상권을 지켜 나갔다. 또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상권 수호 운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상인 연합회(商人聯合會)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본인 경영자나 일제의 시장 정책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인 연합회의 주장은 단순히 상권 옹호에만 그치지 않았으며, 민족적 의식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운동 때에도 서울의 종로 상인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상점을 철시하고 휴업하였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이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갈 때 서울 상인들은 경성시 상민 일동 공약서(京城市商民一同公約書)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3월 9일은 상점을 모두 닫고, 모든 상인은 시위에 가담할 것과 아울러 약속을 어긴 상점은 용서치 않을 것 등이었다.217)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 「독립운동에 관한 건」, 대정(大正) 8년 3월 3일 제10보. 이 공약서의 발표와 더불어 서울 시내 1,000여 개의 조선 상점이 자발적으로 문을 닫아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특히 독립 만세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종로와 동대문 지역의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폐점·철시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자 당황한 일제는 군경을 동원하여 상인들을 위협하거나 회유·설득하여 이를 철회시키고자 하였다. 상인 대표 60명을 초청하여 수차례 개점하도록 설득하다가 통하지 않자, 주모자를 색출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저항하는 상인들의 폐점·철시 운동은 4월 초까지 계속 이어져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상인들은 이후에도 항일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폐점·철시하여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919년 9월 초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자 상점을 닫았으며, 10월 1일에는 상해 임시 정부의 정령에 따라 전국 상인들이 폐점하였다. 일제는 이를 사전에 탐지하고 서울의 중요 상인을 소환하여 개점토록 명령하고 이에 불응하면 가차 없이 엄중하게 처벌할 것임을 전달하였으나, 이날 서울 1,038개의 조선 상점이 일제히 폐점·철시하였다.

확대보기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
팝업창 닫기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서는 서울의 상점들이 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의 철시 경고문(撤市警告文)에 따라 대부분 문을 닫고 철시에 들어갔다. 일제 군경의 탄압을 받아 그날로 가게 문을 다시 열 수밖에 없었지만 서울 상인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매우 강경하였다.218) 김영호, 「3·1운동에 나타난 경제적 민족주의」,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78, pp.644∼646.

1920년 8월 24일에 동양 시찰을 명목으로 한 미국 의원단 일행 49명이 경성에 도착하였다. 이를 기회로 미국 의원단과 세계에 조선 사람의 열렬한 독립 희망과 열정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울 상인들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여 미국 의원단이 도착하는 24일 아침부터 거리의 모든 가게가 철시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국 의원단을 영(迎)하는 경성시는 천기(天氣)까지 험악, 온 장안의 상점은 모조리 철시를 하고 서리발갓치 무장한 경관대의 계엄은 금시에 무슨 중대한 사건이나 이러날듯” 하여 “아모리 보아도 귀한 손님을 마지하는 것 갓지는 아니하얏다.”고219) 『동아일보』 1920년 8월 25일자. 할 정도였다.

종로 네거리의 큰 상점들은 물론 남대문통으로는 은행이나 회사만 문을 열어 놓았을 뿐 남대문 안까지 모두 철시하였으며, 서대문통과 동대문통을 비롯하여 심지어 무교동 골목의 상점들까지 모두 문을 닫았다. 경관들이 닫힌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도록 강요하고, 강제로 가게 문을 뜯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종로에서 철물점 주인을 포박하기도 하는 등 살기등등하였으나, 상인들은 아예 문을 밖으로 잠그고는 몸을 피해 버렸으며, 간혹 경관의 호령에 못 이겨 문을 열더라도 경관만 지나가면 곧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상인들은 미국 의원단이 출국한 다음날인 8월 26일부터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하였다.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일제히 폐점·철시를 단행하여 항일 운동에 동참하는 뜻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인들의 저항 운동은 경제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타나 일화(日貨) 불매 운동이나 조선 물산 장려 운동 또는 민족 기업 건설 운동 등으로 연결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