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2. 민족 상인들의 상권 수호 노력
  • 조선 물산 장려 운동
김세민

조선 사람이 조선 물건을 사야 하는 것은 조선 사람이 살기 위하여 가장 합당한 일이며, 외국 물건이라 해도 조선 상점에 가서 사는 것이 정당하다. 그리하여야 조선 사람도 밥을 먹을 수 있으며, 옷을 입을 수 있다. 사람이 경제 압박을 받고 물질의 곤란을 당하면 아무것도 귀한 것이 없으며 자유도 없고 쾌락도 없는 것이다.220)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자.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경제 자립 운동이다. 민족의 단결된 힘으로 근대 기업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운동은 상해 임시 정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라는 정령에서 흥업(興業)과 식산(殖産)을 강조하면서 국내의 운동으로 표현되었다.221) 김영호, 앞의 글, pp.650∼653.

1920년 8월 평양 기독교계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고자 평양 야소교서원(耶蘇敎書院)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이 운동에 호응한 서울의 조선 청년회 연합회에서는 1922년 말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일간지를 통해 조선 물산 장려 표어를 모집하는 한편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는 지방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이 점차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자 마침내 1923년 1월 서울 낙원동 협성 학교(協成學校) 강당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하였다. 국내 30여 사회 단체가 발기한 이 조직체에는 독립 운동 가·교육자·종교인·기업인·언론인 등 각계각층의 민족 지도자가 망라되었다. 조선 물산 장려회는 “우리의 입은 옷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먹는 음식을 스스로 살펴보고 또 우리의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돌아보라. 그중에 어느 것이 우리의 돈으로 지은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산출한 것인가. …… 우리가 우리의 쓰는 모든 물건을 집과 땅과 몸뚱이까지 팔아서 남의 공급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강산에 몸을 붙이고 집을 지키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 ……”라고 밝혔듯이 “조선 물산을 장려하며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여 조선 경제를 자립할 목적으로” 창립되었다.222) 김영호, 위의 글, pp.650∼653.

확대보기
물산 장려 운동 신문 기사
물산 장려 운동 신문 기사
팝업창 닫기

이와 같은 목표 아래 조선 물산 장려회는 다음과 같은 실행 조건을 정하고 대중 계몽 운동에 나섰다.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 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 소금, 과일, 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사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 생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될 수 있는 대로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기본 정신이었다. 곧 외국 상품을 배척하고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국산품을 애용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3년 2월 15일을 조선 물산 장려 선전의 날로 정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날이 얼른 왔으면, 세월이 빠르다더니 이런 때는 더디도다. 오늘 자고 내일 자고 모레면……” 하고 어린이가 명절 기다리듯 기다렸다. “야! 이제야말로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답다. 토산(土産)을 입고 토산을 먹고 토산을 쓰게 된 것이 분명한 조선 사람이다. 백지 한 장, 먹 한 개라도 다 조선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223) 토산생(土産生), 「물산 장려의 일(日)」, 『개벽』 제33호, 1923년 3월 1일. 감격을 펼쳐 놓듯이 이 운동에 대한 민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며 감격스럽기까지 하였다.

전국 각처에서 토산품만을 쓰기로 한 결의가 연이어 일어났고, 사립 학교에서는 무명으로 만든 교복의 착용 운동이 벌어졌으며, 부인들도 잇따라 토산 애용 부인회를 조직하여 토산품을 애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서울에서 조직된 토산 애용 부인회는 “거미나 개미, 까마귀도 제 살 경륜을 스스로 하는데 우리 조선 사람은 의복 살림이 모두 남의 것이다. 이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 나라꼴이야 어떻든 여자들은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우리가 나라 일으킬 생산 능력은 없으나 토산물을 애용하고 절약하여 민족과 내 가정을 일으키자.”라고 주장하였다.224) 『동아일보』 1923년 2월 7일자.

심지어 기생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토산 장려 기생 동맹이 생겼고, 특히 물산 장려 강연을 듣고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일제 옷을 찢어 버리는 사람도 속출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토산 면포가 유행하여 국산 포목이 잘 팔리고, 점차 공급이 수요를 미치지 못하여 값이 오르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면방직 공업이 발전을 보게 된 것도 이러한 사정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225) 신세계백화점, 앞의 책, pp.178∼180.

그러나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초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조선인 자본이 취약한 상황에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토산품 가격이 폭등하는 등 일반 서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생활상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년이 채 안 되어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