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2. 민족 상인들의 상권 수호 노력
  • 민족 상인들의 성장과 상회사 설립
김세민

일제 강점 이후 왜곡된 식민지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돈의 위력은 커져만 갔다. 전통적 가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비하되었으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배금열(拜金熱)은 날로 더해 갔다.

같은 동양 사람일지라도 중국 사람을 대하면 음울한 것이 연상되고, 일본 사람을 대하면 경박함이 연상되고, 조선 사람을 대하면 군자와 처사가 연상된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람은 그 산수가 아름다운 것과 같이 마음이 맑고 곱다. 무엇을 구태여 얻고자 하는 마음이 적으며, 그 옳지 않으면 천하를 줄지라도 받지 않을 지조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천금산진환복래(千金散盡還復來)’는 우리가 사랑하던 글귀요, ‘인생출전(人生出錢)’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금전관(金錢觀)이었다. …… 우리가 금일 일반으로 들어 알게 된 것은 대강 세 가지 경로가 있으니, (1) 위로는 매관매직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할 때에, 즉 돈만 있으면 세간의 호사를 홀로 할 수 있고 돈만 있으면 입신양명(立身揚名)도 할 수 있다고 느낄 그때에 위아래가 비로소 돈의 위력과 돈의 단맛을 알게 되었다. (2) 그 후 총독 정치가 시작되며 이래 십 년 간에 학식도 문벌도 사상도 인격도 다 쓸 데가 없고 오직 돈만 있으면 신분 좋은 사람 축에 들어 도군참사(道郡參事)나 면역원(面役員) 한 자리라도 얻어 하게 되는 판에 일반은 다시 한 번 돈의 위력을 느끼었다. (3) 최근의 만세 운동과 같이 문화 운동을 시행할 새 이것저것 시설할 것은 부지기수인데 돈 한 가지 없어 그리 못함을 느끼는 때 보는 때에 일반은 가장 절실하게 돈의 필요를 느끼었다.226) 『개혁』 제16호, 1921년 10월 18일.

이처럼 배금열이 퍼지면서 돈을 다루는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으며, 전통 시장과 상가나 백화점 등에서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상업 인 구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1915∼1919년 사이에 서울의 직업 인구 가운데 상업 종사자의 비율은 28∼33%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상업과 공업 및 공무자유업 종사자가 70%를 넘을 정도로 서울은 상공업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22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198.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자본을 축적한 대표적 인물은 화신 백화점의 주인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을 꼽지 않을 수 없고, 포목상으로 유명한 김희준(金熙俊), 최남(崔楠) 등도 이에 못지않은 재력가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40년에 실시한 재계와 실업계의 1년 소득액 조사에서 박흥식은 20만 원으로 3위, 김희준은 15만 원으로 7위, 최남은 13만 원으로 9위를 기록하고 있었다.228) 「기밀실(機密室), 우리 사회의 제내막(諸內幕)」, 『삼천리』 제12권 제8호, 1940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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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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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은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으로 17세에 고향에서 미곡상으로 출발하였다. 1926년에 상경하여 이듬해에 24만 원을 투자하여 을지로에서 선일 지물 주식회사(鮮一紙物株式會社)를 창설하여 비범한 경영 활동으로 성공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1931년에는 종로의 금은보석상인 화신 상회(和信商會)를 인수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34년 화신 상회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큰 손실을 보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최남이 경영하던 동아 백화점을 인수하고 350여 개의 연쇄점을 전국에서 일제히 개점하는 등 사세 확장을 꾀하였다. 1937년에는 화신 백화점 사옥을 7층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고 평양에도 화신 백화점을 개설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활로가 오직 상업의 발전 진흥에 있음”을 알고, 오직 사업에 몰두함으로써 화신 백화점을 창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가 일으킨 화신 백화점은 일제 강점기에 억압받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적 자부 심과 긍지를 불어넣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상인 정신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로 박승직을 빼놓을 수 없다. 경기도 광주 출신인 박승직은 집안이 가난하여 농사일을 돕다가 19세에 송파 상인들과 교제하면서 장사에 투신하게 된다. 1898년경에 서울 배오개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하여 초기에는 포목점을 하다가 그 뒤 업종을 다양화하여 미곡과 식염 등의 위탁업도 겸하였고, 소매뿐만 아니라 도매업도 하였다. 1921년 이 상점은 개인 기업으로서는 최고의 납세자가 되었다.

그의 이색적인 기업 활동 중 박가분 제조 본포(朴家粉製造本鋪)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재래식 화장분(化粧粉)을 기업화한 것으로, 1920년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1930년대부터 일제 고급 화장품이 수입 시판되면서 1937년 폐업하였다. 박승직 상점은 해방 후 그의 아들 박두병(朴斗秉, 1910∼1973)에 의하여 두산(斗山) 그룹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또한 신용 제일과 근검절약의 정신과 아울러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가업에 충실하라.”는 가훈은 지금까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박승직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전통 상인들은 일제 강점기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꿋꿋하게 맡은 일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상업 발달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으며, 자본을 축적한 후에는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계·문화계 등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박흥식과 박승직 외에도 19세기 말 종로에 자리를 잡았던 포목점 ‘수남 상회(壽南商會)’는 합자 회사 형태의 가족 기업으로 출발하여 1910년대 후반에 호황을 누렸고, 1920년대에는 무역업, 도매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5년에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22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177∼178.

1920년 조선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민족 자본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졌다. 마침 김윤배(金潤培)가 종로 2가에 도자기, 철물 등을 판매하는 잡화점 성격의 김윤 백화점(金潤百貨店)을 설립하였고, 유재선(劉在善)은 종로에 계림 상회(鷄林商會)를 설립하여 혼수품, 원삼, 포목, 금은동 세공, 양산, 축음기 등을 판매하였다. 계림 상회는 1926년 합명 회사로 바꾸어 백화점식 잡화점으로 기반을 다져 나갔다.

1920년 이돈의(李敦儀)는 종로 2가에 고려 양행(高麗洋行)을 설립하여 메리야스 종류와 양산 등을 팔았다. 종로뿐 아니라 남대문에도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이 들어섰다. 1926년 신구범(愼九範)은 남대문 1가에서 금강 상회(金剛商會)라는 현대식 백화점과 유사한 잡화점을 개설하였고, 김윤면(金潤冕)은 남대문에서 기존에 운영해 오던 포목점을 화양 잡화점(和洋雜貨店)으로 바꾸어 백화점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였다.230) 조기준,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1974, p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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