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3. 전통 시장의 변화와 백화점의 등장
  • 종로의 조선인 백화점
김세민

1916년 최남(崔楠)이 종로 2가에 양품 잡화, 문방구, 학용품 등을 취급하는 덕원 상점(德元商店)을 설립하였다. 최남은 당시 진고개 일본인 상점에서 경험을 쌓은 한국인 점원을 고용하여 상점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당시 한국인 상점들은 제조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고 서울의 일본 도매상에게 상품을 공급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최남은 경험이 많은 점원을 오사카에 보내 상주토록 하고 일본 공장 제품을 직수입하였다. 이렇게 최남의 덕원 상점은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지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잡화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이어 1919년에는 종로 2가 31번지 탑골 공원 서편에 여성 전용 백화점인 동아 부인 상회(東亞婦人商會)를 인수하여 확장하는 한편 함흥, 대구, 전주, 광주, 나주, 순천, 목포에 지점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31년에는 민규식이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자 이 건물을 전세로 얻어 동아 백화점(東亞百貨店)을 개점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첫 번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동아 백화점이나 화신 상회는 여전히 일본 인이 경영하는 미쓰코시나 조지야 백화점에 비해 규모나 자본력에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고객 유치 방법도 뒤떨어졌다. 1931년 신태익(申泰翊)은 “화신 상회는 한국 사람들이 경품만 좋아하는 것으로 알았던지 1년 내내 ‘만년 경품부 대매출’만 한다.”고 비판하였고, 최남은 “지방에 지점 설치하느라고 동아 백화점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고 하였다.242) 신태익, 「화신덕원 대 삼월정자 대백화점전(和信德元對三越丁子大百貨店戰)」, 『삼천리』 제12호, 1931년 2월호,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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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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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최남은 동아 백화점을 미쓰코시 백화점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그들에게 깨끗한 의복을 입혀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동아 백화점의 특색은 품질이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방면의 직수입망을 더욱 튼튼하게 하였다.

동아 백화점을 경영하기 시작한 최남은 백화점의 중심부에 대규모의 십전 균일점(十錢均一店)을 개설하였다. 이것은 당시 상업계에서는 첫 시도였다. 박리다매(薄利多賣) 방식의 십전 균일점은 일반에게 생소하였기 때문에 취지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그는 십전 균일점에 대한 글을 쓰면서 십전 균일점이 조선에서는 시기상조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제시한 조선에서 십전 균일점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는 값은 싸지만 분량이 많아서 오사카에서 서울까지 오는 물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 서울에서 물품이 품절되면 서울에 공장이 없어서 약 1주일 이상의 시일이 걸려야 보충된다는 점, 중요 물품의 품절을 피하고자 대량의 물품을 구입하면 재고와 파손, 자본 회전이 늦어져 경영 악화의 원인이 된다는 점 등이다.

한편으로 최남은 십전 균일점이 조선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러케하면 성공할 듯

그러나 비록 이와 가튼 여러 가지 난관이 잇스면서도 나는 서울에 약 1만원가량의 자본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으로 이 균일점을 개설한다면 반드시 이익을 보리라고 밋습니다. 서울도 한 곳쯤 한하야, 그리고 지방에는 아직 인구에 밀도상으로 볼지라도 일늠니다. 지방에다가 개점하면 비용 때문에 유지되기 어러울 줄 암니다.

원래 이상으로 말하면 조선서도 아메리까처럼 자긔가 만든 상품을 자기 상점에 내어다가 팔도록 되면 조흘 줄 아는데, 제 공장이 잇스니까 10전에 팔 것을 미리 요량하고 9전이나 8전을 먹혀 제품하여 손해업도록 할 것임니다.

그래서 상품 종류도 여러 백종을 할 것 업시 몃몃까지 필요한 것만 골나서 하는 것이 가할 줄 아니 십전 균일점에서 잘 팔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첫재 식료품부(조흔 재료로 맛잇게, 수량도 알맛게 하여 몃 가지 골나 팔면 인기도 끄을고 장사도 되리라고 본다.) 둘재 자기(磁器)부(모양잇고 신선한 것 몃가지) 셋재 화장품부(요새 시체(時體) 젊은이들은 돈이 적게 들고 맵시는 잘 나어지는 물품을 차즈니까 포-마도, 구림, 백분 등 화장품을 적당하게 준비하여 노코 팔면 인기을 끄을니라고 본다) 그러면 선전은 엇더케 할가. 내가 경험해 본 바로 보면 선전 포스타 가튼 것은 그리 필요하지 안타고 생각함니다. …… 선전은 바람을 타고 흐름니다. 선전 비용은 그러케 과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업슴니다. 오직 요는 조선에 공장이 어서 되어지는 점에 잇슴니다.243) 최남(崔楠), 「십전 균일점(十錢均一店)은 조선서 성공할 것이냐」, 『삼천리』 제7권 제6호, 1935년 7월호, pp.99∼100.

일본 공장에서의 제품 직수입과 십전 균일점을 통한 박리다매의 시도는 최남의 경영관 내지 상업관과 일치한다. 즉 그의 경영관은 상점의 경영을 합리적으로 하여 비용을 최소화하고, 품질 좋은 물건을 값싸게 구입하며, 경영자는 이익을 적게 하여 손님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한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품의 진열에서부터 손님의 눈길을 끌게 하고 유행에 맞는 상품을 갖추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최남의 경영 철학은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면서 얻은 체험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뛰어난 경영 철학에도 동아 백화점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 종로에서 팽창하고 있던 화신 상회에 병합되고 말았다.244) 신세계백화점, 앞의 책, pp.203∼205.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미곡상, 인쇄소를 경영하던 박흥식이 서울에 진출하여 선일 지물(鮮一紙物)로 성공한 것은 20대의 청년 시절이었다. 지물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박흥식은 신태화가 설립한 귀금속상 화신 상회를 36만 원에 인수하여 총자본금 100만 원으로 주식회사 화신 상회를 출범시키고, 이를 기념하여 특별 경품, 보통 경품, 상품권 등 3중의 경품부 대매출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특히 특별 경품 1등에게는 20평짜리 기와집 한 채를 제공하였다.245) 『동아일보』 1932년 5월 10일자.

이때가 1932년 5월이었다. 화신 상회 바로 옆 건물에 동아 백화점이 들 어선 것은 1932년 1월로 화신보다 4개월가량 앞섰고, 규모 면에서도 동아 백화점에 비해 화신은 백화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6일 화신 상회는 동아 백화점의 상호와 경영권 일체를 양수하였다. 동아 백화점의 최남 사장은 박흥식보다 훨씬 앞서 잡화점 업계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의 물품 직수입, 상품권 발행, 금전 등록기 설치, 주택을 상품으로 주는 등의 대담한 상행위로 새로운 경영 방법을 구사하는 박흥식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아 백화점을 흡수한 화신은 두 건물 사이에 육교를 가설하여 양쪽을 오가면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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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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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백화점이 개관한 1932년 12월 14일에는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金本位制)가 폐지되는 바람에 곧바로 일본에서의 금 수출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로 금은 등 귀금속과 여타 상품의 가격이 치솟았다. 금은을 중심으로 하는 화신은 매장과 창고에 잔뜩 쌓였던 재고품으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박흥식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이미 ‘답례용 상품권 증정 사은 대매출’의 성공적 상술로 백화점 경영의 왕자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화신의 경영 방식은 연쇄점 사업을 적극적으로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화신의 면모를 일신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은 연쇄점 사업이었다. 화신의 첫 번째 사업이었던 연쇄점 구상은 서울의 화신에 중앙 본부를 두고, 전국 13개 도의 주요 시, 군, 읍, 면에 설립된 연쇄점은 자기 자본과 책임 아래 경영하는 시스템이었다. 당시의 한국 상인들, 특히 지방 상인은 부동산 담보 능력은 있었지만 현금 동원력이 미약하였다. 화신은 여기 에 착안하여 부동산을 담보로 상품을 공급함으로써 지방 상인이 현금이 없어도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반품을 받아 주었다. 이 구상은 1934년 1월 신문 지상에 먼저 발표되었고, 6월 15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일간지에 전국 1,000여 개소의 연쇄점 모집 광고를 게재하자, 며칠 후인 6월 18일경에는 신청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4년 6월 15일에 『오사카 매일신문』에서 ‘조선의 미쓰코시 화신의 신전술’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보도하였는데, 국내 신문들도 ‘1천 개 연쇄점 설립’이란 제목으로 보도할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화신은 전국적으로 1차 350개의 연쇄점을 일제히 개점시켰다. 화신의 이런 신전략에는 미쓰코시, 미나카이, 조지야 등 3대 일본 백화점도 맞서 경쟁하지 못하였다. 화신의 연쇄점은 지방 상인들에게 새롭고 과학적인 상점 경영 방법을 주지시켰다. 특히 외상 거래에 시달리던 지방 상인들이 정찰제를 시행하여 기존 상행위를 일신하였다는 데에 더욱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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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연쇄점
화신 연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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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연쇄점에서 취급한 상품은 주로 양품, 잡화, 의류, 그릇 등이었으며, 문방구, 식료품, 수예품, 화장품, 완구 등도 취급하였다. 화신 연쇄점의 성공은 박흥식을 일약 백화점 사업의 왕자로 올려 놓았으며, 화신 재벌의 모체가 되었다. 1936년 『경성일보』가 발간한 『조선연감』에는 당시 우리나라 10대 재산가의 한 사람으로 박흥식이 들어 있다.246) 신세계백화점, 앞의 책, pp.20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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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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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가운데 1935년 1월 27일 목조 4층 건물이던 화신 백화점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제1차 연쇄점 선정 결과를 발표한 지 채 1개월도 되지 않은 때였다. 이렇다 할 고층 건물이 없던 시절이라 화신 백화점 앞은 그야말로 불구경하러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화재 당시 박흥식은 아직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이었다. 박흥식은 바로 복구 계획에 착수하였고 500여 직원들은 일치단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총독부, 식산은행, 보험 회사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37년 10월 화신의 서관에 인접한 대창 무역(大昌貿易)의 부지까지 새로 구입하여 지하 1층, 지 상 6층의 현대식 건물을 건축하여 본격적인 백화점 모습을 갖추었다. 이는 미쓰코시나 미나카이, 조지야, 히라다보다 큰 규모여서 이제 화신은 조선 최대의 백화점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시 화신 백화점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백화점’으로 종로의 명물이자 조선 전체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화신 백화점 서관에 들어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시골 사람들의 관광 코스가 될 정도였다.

질색할 노릇은 시골에서 오는 손님들이 승강기를 타고 싶어서 공연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를 여러 차례 하고, 또 종로인만큼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몰려 들어와 손님 노릇을 하는 때도 일일이 ‘고맙습니다’ 소리를 하게 되니까 질색이지요. 요 좁은 속에서도 주정꾼 손님이라든가 놀려먹는 손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못살게 구는 이도 있으나, 이를 깨물고 참고 있으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거리가 짧은 만큼 순간만 참으면 됩니다.247) 「색다른 직업여성과 그들이 본 세상」, 『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자.

경성부 버스에서 안내양으로 근무하다가 화신 백화점의 ‘승강기껄’이 된 김형숙(金衡淑)의 증언이다. “백화점에 들어가도 좋은지 안 좋은지 한참 망설이기도” 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래서 “남 타는 승강기니 나도 한번 타볼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표 찍으시오.’ 소리가 날까 봐 미리부터 조끼 봉창에 손을 넣고 구멍 뚫어진 돈 한 푼을 꼭 쥐고는 땅속으로 몇 만 길이나 떨어지는지 현기증을 느끼면서 급행차가 시골 정거장 지나듯이 4층, 3층, 2층, 그 다음에 가서 승강기가 딱 서면 엉겁결에 튀어 나와 돈을 안 내어 공짜인 줄 알고 좋아하였던”248) 「소대가리 경성(京城) 시골 학생이 처음 본 서울, 재경초일기(在京初日記)」, 『별건곤』 제50호, 1932년 4월 1일. 경험담도 전해진다.

박흥식이 얼마나 뛰어난 경영인이었는지는 연쇄점 사업뿐만 아니라 화재가 났던 해 9월에도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평양의 평안 백화점(平安 百貨店)을 인수하여 12월 1일 화신 평양 지점으로 개관하고, 이듬해인 1936년 3월 초에는 한국 내의 화신 연쇄점을 묶어 자본금 200만 원의 주식회사로 발족시킨 일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화신 백화점의 새 건물이 들어설 즈음에 조선 총독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의 참의가 되고,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용 비행기 헌납 운동에 앞장섰으며, 1944년 10월에는 주식회사 조선 비행기 공업을 창립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였다. 화신 연쇄점 창업 때의 3,000만 원 대부, 백화점 화재 복구 때 받은 조선 총독부와 조선식산은행의 적극적 지원 등은 일제에 대한 협력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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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백화점 광고 포스터
화신 백화점 광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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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화신이 충무로 일대의 일본 백화점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종로 사거리에서 백화점의 왕으로 군림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에 화신 백화점을 선전한 노래의 한 구절에는 이와 같은 자부심이 물씬 드러난다.

종로 십자가 봄바람 부는데

웃음꽃 피는 화신의 전당

안으로는 융화 밖으로는 신용

그 이름도 아름답다 화신이여.24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3, pp.545∼546.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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