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4. 현대 서울의 시장과 상품 유통
  •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의 변화
김세민

광복 이후 남대문 시장 상인들은 상인 연합회를 다시 조직하고 상인들이 출자하여 자체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대문 시장이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1947년 6월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 회원 226명은 회사 주식의 8할 이상이 조선인 소유이므로 적산 회사가 아니라는 진정서를 연명으로 미군정의 민정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또한 상인들은 남대문 시장이 만약 적산이라 하더라도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 회원 중에서 관리자를 선출하여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952년 5월경 남대문 시장의 경영자가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 회장 엄복만(嚴福萬)으로 변경된 것을 보면 그 이후 시장 운영권이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남대문 시장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전쟁 이전 252개이던 점포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51년 6월에 남대문 시장 상인 50여 명이 서울로 올라왔을 때 시장 일대는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었고 인근 북창동 폐허에 100여 개의 노점이 설치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 소속 상인들은 이들 노점 상인들을 끌어들이고 당국의 협조를 얻어 판자나 천막 조각으로 점포를 얽어 장사를 시작하였다. 상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남대문 시장은 1953년 무렵 150여 개의 점포와 500여 개의 노점을 가진 시장으로 거듭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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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의 남대문 시장
전쟁 후의 남대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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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은 일상용품은 물론 사치품과 밀수품,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 등의 거래가 활발하여 “남대문 시장에 가면 박격포도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사치품으로 간주하던 양복지, 카메라, 시계, 양산 등 밀수품 거래가 많았으므로 경찰과 세관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되었다. 상인들은 단속반이 나타나면 불법 물건을 숨기거나 셔터를 내리고 잠적해 버렸으며, 도깨비처럼 날렵하게 도망친다고 하여 ‘도깨비 시장’이란 별명도 붙었다. 또 미제 껌, 초콜릿, 냉장고 등 미제 물건을 많이 거래하였기 때문에 ‘양키 시장’이라고도 하였다.

6·25 전쟁 이후 남대문 시장에는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 잡았다. 빈손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군복, 담요, 유엔 점퍼 등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팔면서 상권을 장악해 나갔으며, 이에 남대문 시장은 ‘아바이 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남대문 시장 내 서울시 경찰국 쪽 골목에는 피난민들이 자리 잡고 순대, 빈대떡 등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떡장 골목’으로 불렀다. 시장 길거리에서는 미군 부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잔반 음식을 섞어 끓인 ‘꿀꿀이죽’을 상인과 지게꾼들에게 팔았다. 어려웠던 시절 먹었던 이 ‘꿀꿀이죽’은 오늘날 사람들이 즐겨 먹는 ‘부대찌개’의 원조가 되었다.

남대문 시장이 1961년 8월 31일 공포된 시장법(市場法)에 규정된 허가 조건을 갖추지 못하자 서울시는 1963년 1월 6일자로 서울특별시 남대문 시장 개설 허가를 취소하였다가 1964년에 이르러 5년 기한으로 개설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다시 연장하고, 1972년 3월에 다시 개설 허가를 연장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대문 시장은 1968년 11월 23일 새벽에 큰 화재가 발생해 775여 개 점포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화재를 계기로 남대문 시장은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우선 제1차로 총 15개 블록 28개 동 중에서 화재로 소실된 3개 블록을 착공하여 1970년 1월 20일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을 완공, 개장하였다. 1971년 6월에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대도 백화점(大都百貨店)을 개장하였다.

1974년 4월 4일에는 자유 상가를 세웠으며,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남대문 시장에 꽃 시장이 개장되었고, 1975년에는 그동안 허가되지 않았던 구역의 대지 1,537평, 건평 3,978평, 점포 667개에 대한 추가 개설 허가를 받았다. 1975년 8월 31일에는 도심지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지녔던 수산 시장, 서울 청과 시장을 각각 노량진과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1977년 4월에서 1981년 11월에 걸쳐 주방용품 매장을 완성하고, 1980년 10월에는 주단 포목, 한복, 수예, 이불 등의 점포와 공예, 수예, 액세서리, 조화 등의 점포가 들어섰다.

1976년 3월 1일에는 새로나 백화점이 개점하였다. 새로나는 다른 백화점과 달리 재고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상설 할인 매장이 대부분이어서 서민들의 알뜰 구매에는 적합하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성향을 따라가지 못해 실패함으로써 1999년 판매 시설을 개선하여 굿앤굿으로 재출발하였다.

이 시기에도 역시 도깨비 시장은 성황을 이루어 당국의 집중 단속을 받았다. 시장 골목에는 망보는 사람이 있어 단속반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고, 이와 동시에 일제히 점포의 셔터가 닫혔기 때문에 단속은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90년대 수입 자율화 이후 모든 상품이 자유롭게 수입되면서 수입품 전문 상가로 변신한 것이 숭례문 수입 상가이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치르면서 남대문 시장 역시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각국의 상인들이 남대문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2000년 3월 30일 명동, 북창동 지역과 함께 문화 관광부로부터 관광 특구 지정을 받았다.25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3, pp.886∼896.

동대문 시장 상인들도 1946년 1월 동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를 부활시켜 상인들 간의 친목과 공동 이익을 도모하고 상권을 보호하고자 하였다.252) 『조선일보』 1946년 1월 6일자. 남대문 시장과 마찬가지로 동대문 시장도 6·25 전쟁 기간에는 점포와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어 천막을 치고 임시 상거래를 하였다. 이때는 구호물자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이 불법 거래되기도 하였다. 1952년 5월 동대문 시장의 점포는 188개로 회복되어 있었으나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점포도 많았다. 이후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상권이 확대되자, 종로 4가 부근 예지동에 자리하고 있었던 동대문 시장은 청계천변을 타고 뻗어나가 종로 5가, 6가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 이어진 점포들은 10m 도로를 무단 점유하고 무허가 판잣집을 세워 시장을 형성해 나갔다. 따라서 이들 점포는 무허가 건물로 취급되어 철거 대상이 되었으며 서울시 당국과 계속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정치 깡패로 널리 알려진 이정재(李丁載)가 한때 동대문 시장 상인 연 합회 회장에 취임하여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돈과 점포를 갈취하기도 하였다. 이정재의 상인 연합회는 한 점포당 청소비라는 명목으로 하루 100환 이상 1,000여 환까지 징수하여 한 달에 1,000여만 환씩을 착취하였고, 심지어 노점상에게도 25만 환의 권리금을 착복하였다. 특히 그는 시장 내에 이정재 왕국을 건설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부 기관까지 두어 시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자치적으로 처리하였으며,253) 『동아일보』 1960년 5월 9일자. 그의 소유로 된 점포 42개를 매월 10만 환씩 월세를 받고 임대하였다고 한다.254) 『동아일보』 1960년 7월 29일자. 그는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권력의 실세와 결탁하여 정치권에 진출하였으며, 단성사 앞 권총 저격 사건255) 『동아일보』 1955년 5월 26일자. 등에도 개입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사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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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동대문 시장
1950년대 동대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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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시장이 종로 5가, 6가 방향으로 상권을 확대되자, 1960년대에 이르러 예지동의 전통적 동대문 시장은 광장 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신 동대문 쪽에 가까운 종로 5가의 시장이 동대문 시장이라는 이름을 썼고, 종로 6가에는 새로운 동대문 종합 시장이 들어섰다. 이처럼 광장 시장, 동대문 시장, 동대문 종합 시장으로 세분화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광장, 동평화, 제일 평화, 흥인, 덕운, 신평화, 남평화, 광희 청평화 등으로 더욱 세분화되면서 지금은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 도소매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일대를 모두 합쳐 동대문 시장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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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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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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