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4. 현대 서울의 시장과 상품 유통
  • 신상품의 등장과 거래
김세민

광복 이후 분단, 전쟁 등으로 얼룩진 사회적 불안은 경제적 침체와 위기로 이어졌고, 시장 또한 제 기능을 다하기 어려웠다. 상품의 생산과 공급이 부족하여 시장에서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밀수품이나 구호품 등이 불법으로 유통되었다. 이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껌, 과자, 시레이션 등이 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하였다.

서울 시민들은 식량 부족과 물가 폭등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날그날 연명해 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도 당 연히 곡물, 채소, 생선, 육류 등 식생활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사치품이나 기호품 등의 거래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샘표 간장은 1946년 8월 일본인이 경영하던 삼시장유양조장(三矢醬油釀造場)을 인수해 우리 입맛에 맞는 간장을 생산하였으며, 대성 공업사에서는 조미료인 미미소를 생산 판매하였다. 바나나와 땅콩은 귀중한 외화를 낭비하는 식품으로 취급되어 수입과 판매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절에도 중국에서 밀수한 것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으며, 바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에는 라면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 삼양 식품이 처음으로 삼양 라면을 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이래 1966년에는 농심 라면의 전신인 롯데 라면이 생산되어 라면업계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음료수로는 사이다와 콜라가 등장하여 일반화되었다. 사이다는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으나, 콜라는 1962년 동방 청량음료에서 ‘스페시 콜라’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다. 코카콜라는 1968년 한양 식품이 미국 코카콜라와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생산,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코카콜라가 대중화되면서 스페시 콜라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방 청량음료는 한미 식품 회사와 합병하고, 1969년에는 미국의 펩시콜라와 제휴하여 코카콜라에 대항하였다.

주류로는 여전히 막걸리가 제일 많이 소비되었으나 소주 또한 대중적인 술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술이었다. 1968년 당시 소주 제조 회사는 270여 개가 있었으나 진로와 삼학이 전체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진로는 부산에서 삼학은 목포에서 시작하였으나, 1960년대에 서울에 진출하면서 소주 시장을 두고 본격적인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 담배나 커피의 수요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여러 가지 국산 담배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었지만 도깨비 시장이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담배도 음성적으로 거래되었다. 당시 항간의 떠도는 이야기에는 정부 단속반원이 담배 연기만 보고도 양담배인지, 국산 담배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내에서 몰래 피우는 양담배를 단속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개항 이후 들어온 커피도 이 시기 대폭 수요가 증가하였다. 당시 커피의 수입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미군 부대나 밀수로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인기가 매우 좋아 잘 팔렸고, 보따리장수를 통해 가정까지 배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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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론 공장
나일론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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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으로는 광목과 옥양목이 가장 대표적인 거래 품목이었으며 양단, 명주, 모직물, 견직물, 나일론, 수입 양복지 등이 있었다. 이들 옷감은 수입품도 적지 않았지만, 태창 방직, 제일 모직, 한국 모직, 동방 모직 등의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많았다. 특히 6·25 전쟁 후 질기고 오래 입을 수 있는 나일론 옷감이 소비자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1950년대 초반 주로 수입에 의존하던 나일론은 1954년 태창 방직이 설립되어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되었다. 이후 나일론으로 만든 와이셔츠, 팬티, 양말이 생산되면서 나일론은 더욱 널리 보급되었으며, 블라우스, 원피스, 속옷, 스타킹을 만들 어 내면서 여성 패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5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26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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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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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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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시기 주목되는 것은 가전제품이다. 1959년 LG의 전신인 금성이 라디오를 처음 생산하였는데, 모든 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해 일부는 일본에서 수입한 부품을 사용하여 조립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은 집집마다 방문하는 행상을 통해 매월 얼마씩 내는 할부의 형태로 판매하였고 할부금도 판매한 행상이 수금해 갔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는 주부들이 많았다. 그 후 흑백텔레비전이 생산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 갔다. 당시 텔레비전은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동네에서 한두 집밖에 없었고,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저녁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방을 가득 채웠다.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이들은 동네 만홧가게로 달려갔다. 만홧가게에서는 돈을 받고 경기를 보여 주었는데 장소가 협소해 못 들어가는 아이도 있었다.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화국에 전화를 신청하면 회선이 부족해 어느 세월에 전화가 가설될지 모르고 심지어 몇 년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급하게 전화가 필요하면 몇 배의 프리미엄이 붙은 백색전화를 구입하던가 아니면 임대해야만 하였다. 전화가 있는 집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웃에게 급하게 걸려 오는 전화가 있으면 연결해 주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잘 낫지 않은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 고약!”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은 광고 문구이다. 종기(腫氣)는 당시 흔한 질병이었다. ‘이명래 고약(李明來膏藥)’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사용해 본 종기약이었다. 기름종이에 싸여 있는 까만 고약을 녹여 환부에 붙이면 종기의 고름은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몇몇 경쟁 제품이 도전하였지만,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가 된 이명래 고약은 1906년 첫선을 보인 뒤로 ‘피부병의 만병통치약’으로 군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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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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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서울 약품에서 생산하여 판매한 원기소도 잘 팔리는 비타민 영양제 중의 하나였다. 원기소는 부잣집 아이들이 주로 먹는 어린이 영양제의 대명사로 통하였다. 아이들의 키가 자라게 한다는 영양제였지만 맛이 고소하기 때문에 과자처럼 씹어 먹곤 하였다. 제조사인 서울 약품이 1980년대 중반 부도가 나면서 생산을 중단하였지만, 여전히 어린이 영양제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문구류 중에는 연필이나 만년필 등은 이미 시중에 나와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 볼펜이 나오면서 필기구의 혁명을 가져왔다. 고무신도 운동화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전까지 많이 판매되는 물품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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