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4. 현대 서울의 시장과 상품 유통
  • 백화점의 변화
김세민

백화점도 경영자, 체제, 방식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화신을 제외한 서울 시내 백화점은 모두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광복 이후 전부 적산으로 취급되어 미군정에 귀속되었다. 당시 백화점의 형태는 대자본이 직영하는 전문적인 모습이 아니라 큰 건물 안에 소매상인들이 모여 있는 시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즉 판매 상품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진열 판매하는 오늘날의 백화점 방식이 아니라 임대 소상인들의 가게가 늘어서 있는 형태였다. 광복 이후부터 1960년에 이르는 동안 백화점의 이름을 내건 곳은 10여 개에 달하였지만 백화점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화신, 동화, 미도파, 신신 백화점 정도였으며, 나머지는 이름만 백화점이라고 내걸었을 뿐 운영과 규모 면에서 일반 상가와 같은 형태였다.25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239∼240.

일본인이 경영하였던 조지야 백화점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이 관할하였다. 1946년 2월 당시 종업원 대표가 상호를 중앙 백화점으로 바꾸었는데, 미군정청은 중앙 백화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건물을 미군 PX 건물로 사용하였다. 군정청이 중앙 백화점을 접수할 당시 백화점에 남아 있던 모든 상품과 종업원은 동화 백화점으로 흡수, 합병되었다. 그 후 중앙 백화점 건물은 1948년에 한국 무역 협회에 불하되었고, 한국 무역 협회에서는 중앙 백화점을 무역관으로 사용하였다.

6·25 전쟁 이후 한국 무역 협회와 임차 계약이 만료되자 정부의 관재청은 대한 부동산 주식회사와 다시 임차 계약을 체결하였다. 1954년 4월 대한 부동산 주식회사는 건물을 보수하고 백화점의 문을 열어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때 미도파 백화점이라는 상호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1954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도파 백화점의 관리권을 무역 협회로 환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관재청에서는 대한 부동산 주식회사와 체결한 계약을 무시하고 다시 한국 무역 협회와 임차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대신 건물 수리비를 대한 부동산 주식회사에 지급하기로 하였다. 한국 무역 협회는 1955년 1월 21일에 미도파 백화점 건물 안으로 이전하였다.

미도파 백화점은 운영권이 한국 무역 협회로 넘어간 이후에도 건물의 지하와 1∼3층의 매장에서 계속 영업하였으며, 1957년에는 300여 개의 점포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미도파 백화점에 대한 임차 계약을 포기해야만 하였던 대한 부동산 주식회사는 4·19 혁명 이후 미도파 백화점에 대한 운영, 관리권을 반환받고자 사원들을 동원하여 농성 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258)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245∼247.

1962년 5월 19일 미도파 백화점은 새로 개정된 시장법에 의거하여 백화점 허가를 받았다. 허가를 받은 자는 사단 법인 한국 무역 협회였다. 미도파 백화점은 여전히 임대 점포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1960년대 후반 경제 성장과 소비 패턴의 변화 등으로 비약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1969년 3월 한국 무역 협회는 종합 무역 회관 건립비 마련을 위하여 5억 원을 받고 미도파 백화점을 진흥 기업에 매각하였다. 진흥 기업은 미도파 백화점을 직영 체제로 전환하고 대규모의 현대식 백화점으로 바꿀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포를 임대 운영하고 있던 상인들은 자신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백화점을 매각한 데 대해 거세게 항의하였다.

1973년 2월 서울시는 미도파, 신신, 화신 등 네 개 백화점을 대상으로 연말까지 직영으로 전환할 것을 권장하였다. 5월 미도파 백화점은 임원진을 교체하였으며, 직영 체제로 전환하고자 매장의 확장과 에스컬레이터 설치, 옥상 주차장 마련 등 증축, 수리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직원 200명과 점원 400명을 모집하여 서비스 교육을 실시하였다. 미도파 백화점은 증축을 완료하고 1973년 11월 1일에 새로 개관하였으며, 주식회사 미도파 백화점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새로 개장한 미도파 백화점은 지하 1층, 지상 6층, 매장 면적 4,300평으로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였으며, 경영 방식 또한 직영 체제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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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파 백화점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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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에 미도파 백화점은 의류 전문 백화점이었던 시대 백화점을 인수하여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완전 직영 체제로 확장 재출발함으로써 백화점 업계는 내부 상인들끼리의 경쟁으로부터 백화점끼리의 경쟁 체제로 돌입하였다.25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301∼302.

일제 강점기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미쓰코시 백화점 역시 1945년 9월 15일에 백화점 이름을 동화 백화점으로 변경하였고, 1950년까지 네 명의 관리인이 교체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을 수복한 이듬해인 1951년 7월 19일 동화 백화점 본관 건물은 미군 PX로 바뀌었다.

1954년 11월 29일 관재청은 미군으로부터 동화 백화점을 양도받아 1955년 2월 20일 다시 영업을 시작하였다. 지하에는 식품 매장, 1층에는 잡화 및 소품 매장, 2층에는 양품 및 의복 매장과 당구장이 있었다. 그리고 3 층에는 동화 극장과 카바레, 4층에는 동방 생명이 임대해 있었다.260) 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25년사』, 1987, pp.67∼68. 운영 방식은 지하 매장만 동화 백화점에서 직영하고 나머지는 임대 매장 방식을 취하였다. 1950년대 말 동화 백화점은 마케팅 기법으로 새나라 자동차 경품을 걸기도 하였다. 새나라 자동차 경품 대회는 동화 백화점의 임대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획한 오늘날의 경품 축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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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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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동화 백화점은 여전히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는 동화를 개인에게 불하하기로 결정하고 강희원(동방 생명 소유주)에게 건물과 대지를 넘겼다. 그 후 5·16 군사 정변으로 들어선 군사 정권은 재건 국민 운동(再建國民運動)의 일환으로 1961년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를 금지하였는데, 당시 백화점의 주 판매 상품이 부정 외래품이었던 만큼 백화점은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동화 백화점은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62년 9월 28일 동방 생명에 소유권을 넘겨주었고, 동방 생명 역시 동화 백화점을 인수한 후 사세가 흔들리면서 급기야 1963년 7월 15일 삼성에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삼성 그룹이 동방 생명(현 삼성 생명)을 인수함에 따라 동방 생명의 소유였던 동화 백화점도 삼성 그룹으로 인수되었던 것이다. 1963년 11월 12일에는 명칭을 동화에서 신세계 백화점으로 바꾸고 영업 방식 또한 임대에서 직영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261) 김병도·주영혁, 앞의 책, pp.116∼118.

신세계 백화점은 기존 영업 방식을 탈피하고 운영의 현대화를 꾀하여 여러 가지 판매 기법을 구사하였다. 1964년 4월에는 처음으로 우편 광고물을 제작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쇼핑 가이드를 만들어 광고에 활용하였으 며, 포장과 쇼핑 백 제작 등에도 관심을 쏟았다. 또한 인기 스타를 판매 요원으로 초빙하거나 미스 코리아 후보들을 초대함으로써 손님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1964년 12월에는 당시 인기 스타였던 허장강, 태현실, 최무룡, 김혜정, 남석훈, 최지희가 1일 점원으로 판촉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신세계 4, 5층 사옥에서는 동양 TV 방송이 개국하기도 하였다.

신세계 백화점은 고객 유치를 위하여 각종 바겐세일을 실시하였는데, 1972년 2월에는 처음으로 꾸러미 판매(번들 세일)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세 개를 묶어 두 개의 값으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손님을 대상으로 법률 상담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74년 5월에는 티셔츠, 면양말 등 140여 종의 상품을 직접 제작하여 ‘공작’이라는 자체 상표를 부착하여 판매하였다.

1970년 6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이동 백화점을 열었다. 시내버스를 개조한 대형 버스에 육류, 채소 등 식품과 가전제품, 양품, 잡화 등 700여 종의 상품을 싣고 요일별로 망우동, 이문동, 도봉동, 쌍문동, 구파발 등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매하였다.26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30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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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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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경영하던 미나카이 백화점 역시 적산으로 커다란 이권의 대상이었다. 충무로에 있던 미나카이 백화점은 건국 후 국유 재산으로 귀속되어 해군 본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퇴계로 확장 공사로 건물 일부가 헐리고, 훗날 원호처(현재는 국가보훈처)가 소유하게 되었다.263) 김병도·주영혁, 앞의 책, pp.117∼118.

일제 강점기 조선 상권의 수호를 외치던 화신 백화점은 광복 후에는 관리자와 종업원 간의 분규, 폭리 사건, 사장 교체, 소유권 분쟁 등으로 일본 계 백화점 이상의 수난을 겪었다. 1945년 10월 화신 백화점 종업원 700여 명은 노동자 대회를 열어 백화점의 관리, 운영에 관한 세 가지 안건을 가지고 사장 박흥식과 교섭을 벌였다. 그동안 화신 연쇄점, 화신 무역, 선일 지물, 대동 흥업의 네 개 회사를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 화신은 1946년 주주 총회를 개최하여 각 회사를 분리 경영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자본금 2,000만 원으로 주식회사 화신 백화점을 창립하고 다시 개점하였다.

화신 백화점의 사장 박흥식은 1946년 2월 폭리 혐의로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비행기 회사의 위로금 2,000만 원을 횡령한 혐의로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9월 22일 제정, 공포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에 의해 1949년 1월에 다시 체포된 박흥식은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역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50년에는 좌익계 종업원들이 화신 백화점의 진열장과 건물 벽에 회사를 비난하는 선전 벽보를 붙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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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의 화신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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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후 화신 백화점은 불에 타 형체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복구하여 다시 개점할 계획이었으나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개점을 연기하였다가 1956년 10월 15일에야 7층까지 수리하여 개점하였다. 1961년에는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박흥식은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고, 소유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정부에 환수당하는 불운을 겪었다.264) 김병도·주영혁, 앞의 책, pp.114∼116.

1955년 11월 15일에는 화신 백화점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신신 백화점이 2층 건물로 화신의 건너편에 문을 열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화신의 복구를 미루고 신신 백화점을 먼저 개점한 이유는 당시 한국의 유통 실정 때문이었다. 즉 당시 넓은 매장을 채울 상품 공급이 어려웠고 임대 수입에 의지하면서 백화점의 간판을 내걸기에는 화신의 이름이 아까웠던 것이다.265) 신세계백화점, 앞의 책, 1992,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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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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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사거리에 마주 보고 있던 화신과 신신 백화점은 1961년 개정된 시장법에 의거 1962년 2월 13일자로 백화점 허가를 받았다. 개설자는 화신 산업 주식회사였다. 화신은 8층 건물이었고 신신은 2층 건물이었다. 화신과 신신 백화점은 여전히 임대 점포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국으로부 터 직영화를 재촉 받고 있었다. 그러나 화신 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직영화는 어려운 과제였다. 1960년대 전반까지 그다지 좋지 않던 백화점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좋아져 화신과 신신 백화점 또한 성장세를 유지하였다. 1968년 6월부터 1969년 5월까지 신신 백화점은 백화점 업계에서 4위를 차지하였고, 화신 백화점은 5위였다. 1970년대 들어서 서울의 백화점 업계는 신세계와 미도파 백화점이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명동 입구에 있는 코스모스 백화점이 가세함으로써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에 화신과 신신 백화점은 자금과 경영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경기 침체와 상품권 발행 금지 등으로 백화점 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화신 백화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화신 그룹은 과도한 투자와 무리한 경영으로 1980년 10월에 거액의 부도를 내고 쓰러졌으며, 이후 화신과 신신 백화점이 모두 매각 처분되었다. 신신 백화점은 제일은행에 매각되었으나, 도심 재개발 사업에 밀려 1983년 8월에 철거되었다. 화신 백화점은 한보 그룹에 넘어갔다가 종로의 도로 확장 공사로 1987년 3월 14일 철거되었다. 이로써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설립한 백화점으로 종로 사거리의 자랑거리였던 화신 백화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26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308∼309.

1980년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백화점이 있는가 하면, 롯데나 현대 등 재벌 기업이 백화점 업종에 진출하면서 직영화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78년에 교회용품 백화점이 출현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에 들어서는 건축 자재, 스포츠 용품, 도서, 혼수, 의류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 백화점과 쇼핑 센터 등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267) 조병찬, 『한국 시장경제사』, 동국대출판부, 1992, p.388.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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