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1. 유래와 연원
  • 기생의 연원
우인수

기생의 연원을 논할 때 흔히 거론되는 여인은 신라의 천관녀(天官女)이다. 김유신(金庾信)이 젊은 시절에 ‘매음방(賣淫房)’에 드나들다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크게 뉘우치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기로 맹세한 바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를 가진 뒤 취한 상태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 던 중 말이 습관적으로 창가(娼家)로 잘못 향하게 되었다. 창녀(娼女)가 나와서 기뻐하며 맞이하자 비로소 잠이 깬 김유신이 분연히 말의 목을 베고는 집으로 돌아갔다는 설화에 나오는 여인이 바로 천관녀이다.2)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 중, 고려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 1975, 47∼48쪽. 그녀는 매음의 기원을 살피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기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편, 기생과 비슷한 듯하지만 매음이 훨씬 더 강조된 존재로 유녀(遊女)가 있는데, 기생보다 저급하게 인식되어 기생과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기생이 존재하던 시기에도 단순 매음에 종사하는 유녀가 있었던 사실이 둘을 구별하여야 함을 말해 준다. 유녀들은 예술적 재능을 요구받지 않았을 뿐더러 관청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생과는 구별되었다.

조선 성종대에 유녀라고 불리는 자들이 원(院)·관(館)과 영(營)·진(鎭)에 많이 있어 봄·여름에는 어량(魚梁)의 세금을 거두는 장소로 가고, 가을·겨울에는 산간의 사찰에 놀러 가 음란한 짓을 행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승려들이 부인을 유인하여 산중의 절에 감추어 두거나, 재산 많은 큰 상인들이 재물로 양가의 처녀를 꾀어내어 실행(失行)하게 하고 돌아갈 수 없게 하여 유녀가 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3)『성종실록』 권20, 성종 3년 7월 을사.

또한, 조선 말에 박제형(朴齊炯)도 관기와 단순 매음녀를 엄격하게 구별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관기는 판여(板輿)를 타고 깁 장옷으로 전신을 감싸면서 낯만 내어놓았다. 창녀는 감히 판여를 타지 못해서 관기와 구별하였다.”라고 하였다.4)박제형, 『근세 조선 정감』 상, 탐구당, 1975, 106∼107쪽.

이로 미루어 기생은 단순 매음녀와는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은 무엇보다 관청에 소속된 공적인 관물(官物)이었다는 점에서 사적인 매음녀와 달랐다. 그리고 기생은 외적인 용모를 기본으로 하되, 예술적 재능까지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역시 단순 매음녀와는 격을 달리 하였다.

기생의 연원과 관련하여 고려해 볼 것은 기생들에게 요구되었던 기능이 기예(技藝)와 여색(女色) 두 가지가 가장 컸다는 점이다. 이는 기생이 황 음(荒淫)과 유희(遊戲)를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연산군 때 어무적(魚無迹)의 지적에서도 확인되는데,5)『연산군일기』 권40, 연산군 7년 7월 을해. 기생이 가진 여색이 황음을 위한 것이고, 그 재주는 유희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유추해 본다면 기생이 생겨난 때는 관청에 소속된 시점과 예술적 재능까지 요구받던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시점은 대체로 고려 전기로 알려져 있다.

확대보기
미인 화장
미인 화장
팝업창 닫기

기생의 기원과 관련하여서는 고려 태조 때에 통제하기가 어려웠던 백제 유민 계통의 양수척(楊水尺)을 관청에 소속시켜 노비로 삼고, 그 중 색예(色藝)가 있는 비(婢)를 기생으로 삼아 가무를 연습하게 한 것이 기생의 시초라고 보고 있다.6)이능화, 이재곤 옮김, 『조선 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동문선, 1992, 22쪽. 조선 후기의 정약용(丁若鏞)은 “수척이란 관기의 별명이다. 지금 물 긷는 관비도 무자이라고 부른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무는 수이고 자는 척으로서 곧 수척이 된다. 수척은 물을 긷는 것으로 얻은 이름이 아니고, 기의 옛 이름이 비로 옮겨간 것이다.”라고 하여 관기와 수급을 수척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23, 아언각비(雅言覺非)) 현종 때에 기생을 교육하는 시설인 교방(敎坊)을 없앤 기록이 있는 것으로7)『고려사』 권4, 세가(世家)4, 현종. 미루어 이전에 이미 기생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설치한 교방은 정확한 설치 연대나 구성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않으나 문종대에 교방의 존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곧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종대에 연등회에서 교방의 여제자(女弟子), 즉 기생이 도사행(蹈沙行)의 가무를 담당한 바 있었고, 팔관회(八關會)에서는 교방의 여제자가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九張機)를 연주하였다고 하여 기생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8)『고려사』 권71, 지(志)25, 악(樂)2, 용속악절도(用俗樂節度).

인종대에는 관에 소속된 기생이 7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전하고 있다. 또한, 기생을 3등급으로 나누어 그 중 가장 뛰어난 기생 260명은 대악사(大樂司)에 소속되고, 그 다음 등급에 해당되는 170여 명은 관현방(管絃房)에 소속되고, 나머지 300여 명은 경시사(京市司)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난다.9)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40, 악률(樂律). 충렬왕대에는 각 지방에서 기예가 뛰어난 기생들을 뽑아 올려 교방을 충실하게 하였다는 기록10)『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5년 11월.도 있어서 교방이 고려 사회에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이렇게 기생이 형성된 이후에는 신분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출산에 의한 자체 재생산이 구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밖에 전쟁 포로나 범죄에 따른 형벌 또는 관비로부터의 보충 등이 충원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