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2. 삶을 규제한 틀
  • 인원의 증감과 제도의 존폐
우인수

조선은 고려의 기생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면서 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기생 제도의 존립과 폐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유교적인 명분론(名分論)을 앞세워 폐지를 주장하는 논리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존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섰다.

1410년(태종 10)에 서울과 지방의 기생을 없애려는 논의가 가장 먼저 있었다. 이때 대신인 하륜(河崙)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자 임금이 웃고 그대로 따른 적이 있었다.11)『태종실록』 권20, 태종 10년 10월 병오. 이어 세종대에도 기생 제도의 존립과 폐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뭇사람들이 폐지에 찬성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대신 허조(許稠)가 오히려 폐지론에 반대하는 논리를 폈다. 이때 허조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고 한다.

허 문경공은 조심스럽고 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엄격하고 법이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허 공은 평생에 음양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큰아들 후와 둘째아들 눌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하였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에게만은 이 말이 미치지 아니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반대할 줄 알았다.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책을 만들었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 금할 수 없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의 물건이니 취하여도 무방하나 만약 이 금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은 모두 비의(非義)로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허물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 하였다.12)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9,(『국역 대동야승(國譯大東野乘)』 1, 민족 문화 추진회, 1982) 229쪽.

이렇게 하여 기생은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기생 제도 혁파에 찬성하리라는 주변의 예상과 달리 허조는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서울에 거주하던 경기의 정원은 세종대에 108명, 125명, 100명 등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다가13)『세종실록』 권19, 세종 5년 3월 정유 ; 권115, 세종 29년 3월 경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150명으로 규정되었다.14)『경국대전(經國大典)』 권3, 예전(禮典), 선상(選上). 경기는 대부분 외방(外方)의 기생 중에서 젊고 재색(才色)이 뛰어나 선발된 자들이었는데, 대개 3년마다 한 번씩 뽑아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다.15)『경국대전』 권3, 예전, 선상. 경기는 악공(樂工)과 마찬가지로 태평관 근처의 동네에 거주하면서 관습도감(慣習都監, 나중에 장악원으로 재편)에서 악기와 가무를 익혔다.16)김종수, 『조선시대 궁중 연향과 여악 연구』, 민속원, 2001, 147쪽. 연산군대에는 경기의 수를 본래 수의 배에 가까운 300명으로 늘렸다.17)『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 10월 무오. 그러나 반정으로 집권하여 연산군시대를 청산하려 한 중종대에는 원래의 정원인 150명도 많다고 하여 80명을 감액하여 70명 정도로 대폭 줄였다.18)『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10월 경술.

한편, 지방에 소속된 관기의 수는 각 고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19세 기 읍지(邑誌)에 나타난 기생 수를 중심으로 그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에서는 평양이 180명에 달한 때도 있어 지방 중에서 가장 많은 기생을 보유하였다. 모든 군현에 기생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기생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군현의 기생 수는 대도호부·목·도호부는 4∼44명, 군은 6∼27명, 현은 1∼13명 정도로 고을에 따라 많은 편차를 보여 주고 있다.19)이규리, 「읍지로 본 조선시대 관기 운영의 실상」, 『한국사 연구』 130, 한국사 연구회, 2005, 170∼171쪽. 대체로 읍치(邑治)가 큰 곳일수록 많은 수의 기생이 배정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생의 수요와 관련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중종대는 기생 제도 자체의 존폐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이때 도학(道學)정치를 부르짖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일파는 음란한 기풍을 키우는 여악(女樂)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신들의 생각은 기생을 전부 폐지하는 데에 난색을 보이면서 축소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곧 내연(內宴)에서는 여악을 쓰되 정전에서는 여악을 폐하자는 것으로 이 정도로도 서울의 기생 수를 줄일 수 있으며, 작은 고을의 기생은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기생 제도 존속의 큰 명분으로 거론된 것은 변방의 군사들에 대한 위무(慰撫)의 필요성이었다.20)『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10월 갑진·11월 정사.

몇 년 뒤 다시 기생 제도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조광조를 위시한 개혁파는 대개 국가에서 음란한 무리를 위해 기생을 두고서는 세상의 인심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종은 내연에서의 여악과 변방 지역 이외의 기생은 혁파하자는 쪽이었다. 조광조도 변방 지역만 예외로 하면서 외방의 기생을 혁파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식(金湜)은 변방까지도 없애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중종은 변방 지역은 꼭 기생이라고 이름 지을 필요 없이 관비로써 그 역할을 담당케 하면 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하였다.21)『중종실록』 권27, 중종 12년 1월 정해 ; 권34, 중종 13년 7월 무신 ; 권35, 중종 14년 1월 기유.

그 후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기 자체가 일시 폐지되었다. 이 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전란을 겪은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근신하는 풍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광해군대에 장악원(掌樂院)의 여악이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반정을 거쳐 집권한 인조는 조정의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목적에서 여악을 다시 혁파하였다.22)『인조실록』 권1, 인조 1년 3월 계축. 이후 여악은 조선 말까지 다시 설치되지 못하였다. 장악원의 여악이 혁파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서울에 상주하는 기생은 없어진 셈이었고, 여악이 필요할 때는 지방의 기생을 한시적으로 불러야 했다. 그리고 기존 경기 역할의 일부분은 약방 기생이라 불리는 의녀나 상방 기생이라고도 하는 침선비가 담당하는 등 변칙적인 운영이 그 공백을 메웠다.

확대보기
전모를 쓴 여인
전모를 쓴 여인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