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3. 예술적 재능의 발현
  • 가무의 공연과 악기의 연주
우인수

여악은 악기와 가무를 담당하는 장악원 소속의 기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악을 둔 것은 대비전(大妃殿)의 잔치, 사신을 위한 잔치, 명절 때 경축하는 잔치 등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궁중의 내연(內宴)에서 기생들은 악기를 연주하였고, 노래와 춤을 담당하였으며, 각종 기물(器物)을 들고 있거나 의전(儀典)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큰 잔치가 열릴 때면 장악원 소속의 기생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지방의 기생 중 재능이 있는 자들을 임시로 더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기생이 참여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연회로는 외연(外宴)과 내연이 있었다. 외연에서 기생들은 주로 노래와 춤을 맡았고, 악공은 악기 연주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외연에 기생을 쓰지 말자는 논의가 일찍부터 제기되어 많은 논란거리가 된 바 있어 외연에서 기생이 담당한 역할은 시기에 따라 약간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대개 외연에 기생이 참여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다만, 1433년(세종 15) 이후 대략 20여 년간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 년간은 외 연에 기생들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외연에 기생의 참여를 억제하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기생 대신에 무동(舞童)을 쓰는 것으로 정착되었다.34)김종수, 앞의 책, 221쪽.

확대보기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팝업창 닫기

외연과 달리 주로 여성들이 관람하는 내연에는 기생들이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까지 담당하였다. 기생들의 악기 연주가 여의치 않을 때는 부득이 관현 맹인(管絃盲人)을 활용하였다. 그런데 1795년(정조 19)에 내연 때도 악공들이 장막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으로 바꾼 뒤로는 기생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일은 없어졌다.35)김종수, 앞의 책, 258쪽.

내연에 기생이 참여하는 것은 연회 자체를 열지 않았던 일시적인 기간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서울 장악원에 상주하던 기생들이 내연에 동원되었고, 장악원의 기생이 혁파된 인조 이후에는 내연이 있을 때마다 지방의 기생들이 차출되었다.

외연은 기생이 남악(男樂)으로 대체되긴 하였어도 내연에서의 필요성 때문에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연회 자체가 열리지 않게 되자 연회에 동원할 기생의 필요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광해군 때에 일시 복구되어 외연에 기생이 쓰였으나, 인조 때 다시 혁파되면서 외연에서는 남악을 쓰는 것으로 거의 정해졌다.

확대보기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팝업창 닫기

장악원 소속의 기생을 없앤 것은 인조반정 이후 왕실과 조정이 앞장서서 유풍(儒風)을 진작하고 재정 부담을 줄이겠다는 가시적인 선언이었다. 그러한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있었다. 바로 그전부터도 기생이 맡아 하던 연회에 보조로 참여하기도 하던 의녀들과 침선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약방 기생이라 불리던 의녀들과 상방 기생으로 불리던 침선비가 기생의 대안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특히 정조 이후 내연에 외방 기생과 함께 의녀와 침선비가 정재(呈才)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전에도 의녀와 침선비가 내연에 참여한 적은 있었으나 기물을 드는 단순한 역할만 맡았었다. 그런데 이즈음 부터는 가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내연에서 의녀와 침선비의 역할은 점점 더 커져 작은 연회일 경우에는 지방의 기생을 불러올리지 않고 의녀와 침선비만으로 정재를 소화해 냈다.36)김종수, 앞의 책, 274∼275쪽. 그리하여 가무에 자질이 있는 지방의 기생들이 의녀나 침선비로 차출되어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37)『청구야담(靑邱野談)』 2, 추기임로설고사(秋妓臨老說故事), 아세아 문화사, 1985, 258쪽. 이는 지방 기생 중 출중한 자를 장악원에 상주시키던 제도가 없어지면서 그 역할을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변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고종 초반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는 궁중의 여러 가지 연회를 지방 기생을 선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 기생만으로 치르고 있었다. 이는 바로 서울의 의녀를 기생으로 활용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38)신경숙, 「안민영과 기녀」, 『민족 문화』 10, 한성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 1999 ; 신경숙, 「19세기 일급 예기의 삶과 섹슈얼리티-의녀 옥소선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65, 한국 사회사 학회, 2004, 54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