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5. 처지와 생활상
  • 열악함과 과분함
우인수

기생의 신역(身役)은 국가의 크고 작은 연회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가무를 공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기생들은 일정 기간 관청에 복무하면서 연회의 연습, 악기 연습, 가무 연습 등에 종사하여야만 했다.

장악원에 소속된 기생들은 복무의 대가로 약간의 쌀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서울에 선상하고 있는 기생은 일 년에 한두 차례 쌀을 한 섬(石)씩 지급받았고,67)“제생원 의녀의 경우 고생이 많다며 여기의 예에 의거하여 1년에 두 번 쌀을 지급하라.”(『세종실록』 권65, 세종 16년 7월 경자)와 “의녀는 대개 외방 사람이고 산업이 매우 어려우니 여기의 예에 따라 해마다 1석을 주게 하라.”(『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4월 경진)는 조처를 통해 기생에게 일 년에 쌀 1석을 두 차례 나누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일기』 권56, 연산군 10년 12월 기묘에 따르면 음률을 익히는 기생 중 우수한 자 50명에게 의녀의 예에 따라 급료를 주었다고 한다. 봉족(奉足)까지 배정되어 생계를 보조받고 있었다.68)『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2월 신해. 그러나 이러한 급료나 봉족이 계속 잘 보장된 것 같지는 않다. 광해군대에는 몇 해를 두고 급여를 받지 못하거나 봉족도 장부에만 나타날 뿐 실제로 배정을 받지 못하여 기생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69)『광해군일기』 권158, 광해군 12년 11월 임오.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기역(妓役)에 종사하던 기생들도 입역(立役)하는 관비와 비슷한 처우를 받았다. 기생 중에 지위가 높은 수기(首妓)가 의녀나 식비(食婢) 등 특별한 직능을 가진 관비와 같은 액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함경도 북청은 매달 좁쌀 세 말(斗)씩, 강원도 원주는 매달 조(租) 다섯 말씩을 받았으며, 일반 기생은 그보다 조금 더 못한 처우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정한 급료 외에 명절 때에는 따로 곡식, 생선, 땔감, 옷감 등을 특별히 지급받기도 하였다.70)이규리, 앞의 글, 181∼183쪽.

고정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회에 참석한 후 사례로 지급받는 연폐도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세종대에는 연회에 참가한 기생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수고한 대가로 상등은 면포 두 필, 중등은 면포 한 필과 정포 한 필, 하등은 면포 한 필씩 지급하여 생계를 도운 사실이 있다.71)『세종실록』 권26, 세종 6년 11월 기축.

그러나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얻는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기생은 사적인 수입원을 확보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 복무 기간이나 시간 외에는 사적인 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생이 먹고 입는 생계의 방편이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막지 않았다.

그 사적인 영업은 대부분 지배층의 개인적인 잔치에 참석하여 가무와 악기로 여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더러는 양반 관료의 위세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동원되는 연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부터 기생들은 크고 작은 각종 잔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불려 다니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연산군대에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기생이 본연의 임무는 제쳐 두고 사대부 잔치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 양반 관료들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더라도 기생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저(京邸)나 활 쏘는 곳에 기생과 악공을 불러 대어 기생들이 음악을 익힐 겨를이 없다는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72)『연산군일기』 권23, 연산군 3년 5월 경오 ; 권40, 연산군 7년 7월 을해 ; 『중종실록』 권4, 중종 2년 11월 정미.

의정부에서도 당시 폐단을 지적하여 “친한 벗을 접대할 적에도 가무와 관현(管絃)이 없으면 서로 대작을 하지 않아 하루 동안에도 주연을 베푼 집이 그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기생과 의녀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의녀는 글을 읽을 여가가 없으며, 기생은 음악을 익힐 여가가 없습니다.”라고 걱정하기에 이르렀다.73)『연산군일기』 권38, 연산군 6년 8월 신해.

한번 형성된 이러한 풍조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선조대에도 여염의 크고 작은 술잔치에 의녀를 불러 모아 의녀에게 의술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우려가 있었다.74)『선조실록』 권186, 선조 38년 4월 갑인. 광해군대에도 장악원에서 “정부나 예조라고 하더라도 수연(壽宴)이나 경연(慶宴) 이외에는 일체 기생과 악공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면서 노래와 음악을 연습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75)『광해군일기』 권174, 광해군 14년 2월 정해. 숙종대 숙질 사이인 민암과 민종도(閔宗道)는 각각 함경도 관찰사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각자의 형이자 아버지인 민점(閔點)의 연회를 위해 자기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명기를 골라 역마(驛馬)를 태워 서울로 보냄으로써 물의를 빚었는데,76)『숙종실록』 권6, 숙종 3년 8월 기유. 이 사건도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한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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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중 재색이 특히 뛰어나 국왕의 눈에 들었을 때는 분에 넘치는 특별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태종 때에 나이 어린 기생으로 명빈전(明嬪殿)의 시녀로 뽑힌 삼월(三月), 가희아(可喜兒), 옥동선(玉洞仙) 등은 각기 쌀 세 섬씩을 하사받았다. 특히 김해에서 선상한 기생 옥동선은 부모까지 서울로 불려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배려를 받기도 하였다.77)『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10월 경진. 그리고 연산군이 총애한 나주 기생 백견(白犬)은 상등 논 50결, 밭 30일 갈이를 원하는 곳에 골라 받는 특혜를 누리기도 하였다.78)『연산군일기』 권60, 연산군 11년 12월 무오.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후궁 장녹수도 기생 출신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조선시대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도 국왕이나 권력자의 총애를 받아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은 일이 종종 있었다. 예종이 총애한 영롱(玲瓏)과 알운(遏雲), 최충헌이 총애한 자운선(紫雲仙), 충숙왕이 총애한 만년환(萬年歡), 우왕이 총애한 개성(改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심지어 우왕은 기생 칠점선(七點仙)을 영선 옹주로, 이어 소매향(小梅香)과 연쌍비(燕雙飛)를 각각 화순 옹주와 명순 옹주로 책봉하기까지 하니, 그녀들은 고금에 찾기 어려운 총애를 누린 셈이었다. 이러한 고려 말의 관행이 조선 초에도 이어져 태종 때에 기생 가희아가 혜선 옹주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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