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5. 처지와 생활상
  • 천역의 대물림과 기첩으로 살아가기
우인수

기생들은 나이 50세가 되어야 악적이나 기적에서 제외되면서 신역이 면제되었다.79)『경국대전』 권5, 형전(刑典), 공천(公賤) ; 『성종실록』 권236, 성종 21년 1월 정축. 간혹 50세 이전에 역을 면제받거나 역이 경감되기도 하였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세종대에 종친 이순몽(李順蒙)의 기첩이 내연 이외의 기역(妓役)을 왕명으로 특별히 면제받은 적이 있으며,80)『세종실록』 권109, 세종 27년 7월 신묘. 성종대부터 왕실 종친의 기첩으로서 아들을 낳은 경우에는 내연을 제외한 역을 지지 않는 배려를 받게 되었다.81)『성종실록』 권236, 성종 21년 1월 정축. 이는 종친인 가야령(伽倻令) 이천종(李千終)이 자신의 어미인 기생 승천금(勝千金)이 종친의 어미인데도 여전히 기역을 감당하고 있으니, 이는 대체(大體)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어미의 나이가 43세이긴 하지만 기역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하지만 기생은 특수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면역도 쉽 지 않았거니와 완전한 속신의 대상이 되기는 더욱 어려웠다.82)『명종실록』 권9, 명종 4년 7월 신사.

신분제 사회에서 기생의 천역은 대물림되었다. 기생의 자식은 원칙적으로 천인의 신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자손은 기생이나 악공 또는 무동이 되어 그 업을 세습해야만 하였다. 다만, 세종대에 몇 차례 논의 과정을 거쳐 유품(流品)이나 조관(朝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특별히 천인을 면할 수 있게 하였다.83)『세종실록』 권113, 세종 28년 7월 을미. 그리고 성종대에는 기생으로서 정한 남편이 있어 출입하지 않고 그 집에만 기거한 기첩의 자녀에 한하여 천인을 면해 주었다.84)『성종실록』 권98, 성종 9년 11월 무인·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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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舞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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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역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걸 수 있는 일은 바로 괜찮은 양반의 기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도 분명히 이로운 점이 있었다. 뭇 남성을 상대하지 않고 한 사람만을 지아비로 두고 살 수 있었으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태어나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그 길이 최선이었음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많은 양반 관료들이 관기를 기첩으로 거느린 데는 기생들이 수동적으로 선택된 것뿐이 아니라 기생들의 능동적인 치열한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조선 말기 해주의 기생 명선의 경우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명선은 16세에 감사의 막내아들 김 진사를 만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가 애타는 기다림 끝에 서울로 불려가서 기첩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대부분의 기생이 갈망하는 성공 사례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명선은 서울로 떠나면서 남아 있는 동료 기생들에게 조언하는 형식으로 작품을 남겼고, 이 작품이 해주 기생 사이에 회자(膾炙)되었다. 그녀는 괜히 잘못하여 오입쟁이, 서리, 장교에게 의탁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동료 기생들에게 조언하였다.85)정병설, 앞의 글, 2001. 소설 『춘향전』에서 수령의 아들 이몽룡을 만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춘향의 일생은 바로 기생들의 염원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대부분의 기생에게 일어나기 어려운 그야말로 희망 사항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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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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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과 같은 시기 해주의 기생이던 삼증(三憎)은 황해도 관찰사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관찰사의 딸까지 낳았지만, 관찰사의 선택을 받아 기첩이 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나이 들고 병든 몸으로 바로 그 딸을 데리고 해주 감영 앞에서 주막을 경영하며 쓸쓸한 만년을 보내야 하였다. 기생이 된 그 딸마저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병든 상태였으니, 대물림하는 고단한 기생의 일상 삶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하겠다.86)신경숙, 앞의 글, 2004, 68∼69쪽.

그런데 양반 관료의 기첩이 된 기생 중에는 더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르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총애를 받는 기첩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숙종대에 사간 최계옹(崔啓翁)은 관기의 쇄환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진언을 하였다.

뇌물의 지름길이 공경대부의 폐첩(嬖妾)에게 많이 모여드는데, 기첩의 경우가 더욱 심하다고 하니, 관기를 쇄환하는 영을 엄격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7)『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 11월 임자.

최계옹의 진언은 영의정이던 신완(申琓)의 여러 기첩 가운데 성천 기생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녀는 온갖 뇌물을 받고 청탁에 개입하여 물의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었다. 신완은 첩을 여러 명 두었는데, 이들 기첩이 줄지어 집을 짓고는 한가로이 살면서 사랑을 시새우며 극도로 사치를 부려 세상에 비교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뇌물로 청탁하는 무리가 그 집에 몰려들어 이서(吏胥)의 승강(陞降)과 둔감(屯監)의 차출(差出)이 모두 그 손아귀에서 나오고, 부유한 창고와 넉넉한 관사의 고직(庫直)과 서원(書員)은 그의 노예가 아니면 비부(婢夫)이며, 여러 첩의 형제가 연줄을 타서 이익을 노려 태복시(太僕寺)의 둔전곡(屯田穀)은 그 대부분이 첩(帖)을 받아 발매(發賣)하는 대로 돌아가 태복시의 창고가 텅 비게 되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장교의 차출에까지 관여하여 주장(主將)된 자가 손을 쓸 수가 없으며, 그 밖의 비루한 일들이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이 기첩 중의 한 명은 신완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 권세를 믿고 관찰사 홍만조(洪萬朝)의 가족과 길에서 마주쳤을 때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시종하던 노복들끼리 서로 싸우는 물의를 일으켜서 국가 기강의 해이를 염려하는 장령 김두남(金斗南)에게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88)『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 11월 계축 ; 권41, 숙종 31년 4월 병자.

신완의 기첩이 일으킨 폐단은 밖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생이 뇌물을 받는 창구 구실을 한 많은 사례가 『조선 왕조 실록』에 나타나는 것이다. 숙종 때에 회령 부사 이하정(李夏禎)은 요사스러운 기생에게 혹하 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았다.89)『숙종실록』 권64, 숙종 45년 11월 임진. 경종 때에 벽동 군수 최인후(崔仁垕)는 관기를 데리고 살면서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첨정(簽丁)과 결옥(決獄)을 한결같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는 것으로 탄핵을 받았다.90)『경종실록』 권10, 경종 2년 10월 임신. 또 박천군의 좌수 한이림(韓以臨)은 그의 아들이 평민을 때려죽인 죄로 옥에 갇혔으나 수령의 기첩에게 뇌물을 써서 석방시켰다.91)『경종실록』 권14, 경종 4년 2월 신미. 영조 때에 평해 군수 유동무(柳東茂)는 뇌물을 받는 통로로 기생을 활용하여 탄핵을 받았으며, 운산 군수 장두주(張斗周)도 요사한 기녀에게 홀려서 크고 작은 송사에 모두 그녀의 말만 따라 뇌물이 버젓이 행해지게 한 것으로 탄핵을 받았다.92)『영조실록』 권6, 영조 1년 6월 무인 ; 권19, 영조 4년 10월 경진. 길주 목사 이방붕(李邦鵬)도 사랑하던 기생이 옥송(獄訟)에 관계하여 뇌물을 공공연히 받은 것으로 탄핵을 받았다.93)『영조실록』 권122, 영조 50년 1월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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